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smine Jan 06. 2024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자스민의 중고영화 <괴물>


이제 막 연극영화과에 발을 들인 신입생 시절, 술자리에서 만난 선배들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묻곤 했다. “너는 어떤 영화 좋아해?” 혹은 “어떤 감독 좋아하는데?”


영화감독을 꿈꾸던 스무 살의 나는 ‘구로사와 아키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처럼 발음하기도 어려운 감독들의 이름을 줄줄 대었는데… 곧 여기에는 <아무도 모른다>(2005)로 존재를 각인시킨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그의 영화에는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지독하리만치 냉혹하고 비루한 현실에 처해있는 아이들. 그 속에서도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 아이들의 성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관망할 수밖에 없는 관객들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는 아이들에게 거짓 연기를 시키지 않는 탁월한 디렉팅 능력이 뒷받침된 결과이기도 한데, <아무도 모른다>에서 선연한 눈빛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야기라 유야’는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최연소 배우가 되었다.


<아무도 모른다> 보도스틸 | 제공: 디스테이션



개인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손에 꼽는 <어느 가족>(2018)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바닷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가족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할머니는 소리 내지 않고 입모양 만으로 ‘다들 고마웠어’라고 말한다.-이 장면은 ‘키키 키린’이라는 노배우의 마지막 필모로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어느 가족>의 원제는 ‘좀도둑 가족’. 어딘지 단단히 뒤틀린 관계 맺음으로 형성된 한 가정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품이다. 여기서 벅찬 행복감을 안겨주는 따뜻한 풍경이란,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불안감과 동시에 한없는 슬픔을 불러오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단순히 ‘좋아하는 감독’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모자란 건, 이토록 복합적인 감정을 불시에 안겨주기 때문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행복과 슬픔, 삶과 죽음의 이면을 동시에 들추는 기분이랄까.


<어느 가족> 보도스틸 | 제공: 티캐스트



지난해 말에 개봉한 <괴물>이 영화 꽤나 좋아한다는 매니아들 사이에 입소문을 내며 ‘2023년 최고의 영화’로 언급되는 데에는 이 같은 감독의 빼어남이 작용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건을 세 개의 관점에서 되짚어가는 동안, 조각난 파편들이 모여 세계는 견고해지고 서사를 입힌 인물들은 입체감을 얻는다.


영화 속의 누구 하나 순수하게 착하지만도 않고 악하지만도 않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적대감을 일으키는 사람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일면이 드러나는가 하면, 뭐든지 이해해 줘야 할 것 같은 사람이라도 악의 없는 잘못을 저질러 당혹감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국 영화가 끝나고서도 현실의 모순은 사라지지 않기에, 영화를 보는 동안에 켜켜이 쌓인 감정의 무게가 몸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저 영화 속에서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던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랄 수밖에.


<괴물> 보도스틸 | 제공: (주)NEW



<괴물> 포스터에는 이런 카피가 적혀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나는 여기에 한 단어를 더하고 싶다. 인간의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관객들로 하여금 분명 어딘가에 감춰져 있던, 혹은 감추고 싶던 마음들을 직면하게끔 한다. 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들을 그러안고 극장을 나서면서,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영화 속 장면을 오래오래 되감아 본다.




해당 글은 뉴스레터 [디스턴스]에서 발행한 "자스민의 중고영화" 11번째 편입니다.

* 영화 정보를 포함한 전문 보기 >> (링크) 

* [디스턴스] 구독하기 >> (링크)


자스민의 중고영화 | 교복을 입고서 비디오 가게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에 영화감독의 꿈을 품고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졸업영화를 찍고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영화 홍보마케터로 수년간 일하며 영화계의 쓴맛 단맛을 고루 섭취하고, 무럭무럭 자라 글 쓰는 마케터가 되었다. <자스민의 중고영화>에서는 스크린에 비친 장면들을 일상의 프레임으로 옮겨 그 간극(distance)을 헤아려볼 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