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승우 Apr 03. 2024

Decision To Never Leave

당신의 영원한 용의자가 되겠어요

사랑이라는 어휘를 가급적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단어가 튀어나올 나올 때마다 징그러워요. 구어체든 문어체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할지, 더 이상 대가를 치를 가치는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제는 파산을 맞은 관념이 되었어요. 이건 사랑을 믿느냐 안 믿느냐 따위의 밸런스 게임과는 또 다른, 언어가 지닌 본질적 한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말이란 구체적이고 명확한 수단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부질없습니다. 보기에는 퍽 그럴듯하지만 산패(酸敗)하기 쉬운 음식처럼요. 사랑을 입에 담는 순간 허망함이 밀려오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요. 또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하지 않는 증거가 되는 경우는요. 가끔은 내가 내뱉고도 그 말의 진위가 스스로 의심스러워지기도 하죠. 엉성한 그물처럼 종국에는 아무것도 건져올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단어의 범용성은 무시무시하면서도 빈약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아는 이름이 있는 한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그래서 복잡한 맥락을 무시한 채, 편리하고 단순하게, 생전 보지도 못한 전언어적 존재를 이름으로 규정하려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있으니 사랑은 어딘가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것은 영원성의 환상입니다. 나의 사랑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내 마음만은 다를 거라고, 우리는 착각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희한하죠. 낱말들이 세상 무엇보다 오래 간다는 게. 사람의 마음을 숙주 삼아 기생체로 살아남고,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다는 게.


물론 인류 전반에 걸쳐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그걸 위해 애쓰는 행위에 가치를 두는 건 그것대로 좋습니다. 다만 좀 다른 형태를 고민해볼 때가 아닌가 싶어서요. 그 점에서 <헤어질 결심>은 독특합니다. 흔해 빠진 사랑을 범용하지 않은 비언어로 이야기하다니. 이 영화 엔딩이 로맨틱하다고 느껴진 게, 처음에는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나도 배운 변태 박찬욱 감독과 동종인가 하고 혼자 감탄하기도 했어요. 너무 서래 편에서 하는 말이긴 해도, 사랑이 영원할 방법이 있다는 건 매력적이죠. 일상의 불가항력에 갉아먹히거나, 끝나버린 시간에 사망선고를 내리고 추억으로 치장하는 뻘짓을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즉, 제목과 달리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결심’이었던 겁니다. 방법이 좀 기괴하면 어떻습니까. 영화가 다 그렇죠.


나는 당신의 심장을 가지고 깊은 바닷속으로 수몰될 테니, 원컨대, 당신의 미결 사건으로 남게 해주세요. 당신의 영원한 용의자로 있게 해주세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쫓는 존재가 되겠어요. 아아, 유니크하잖아요. 희소가치 짱이잖아요. 듣도 보도 못한 고백이라는 생각, 들지 않나요. 아무와 섹스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아무나 형사와 용의자의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군인이 적에게 항복할 수는 있지만, 경찰이 범인 잡기 싫다고 내팽개칠 수는 없는 법이에요. 추격하고 해결할 미스터리를 마주하면 생기가 도는 형사에게, 하물며 망망대해에 묻혀버린 ‘완전한 실종 상태’의 용의자가 상대라니, 백전백패죠. 된통 걸린 거예요.

우리의 삶은 얼핏 보면 가방 속에서 잔뜩 꼬여버린 케이블처럼 복잡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전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의외로 단순하기도 해요. 인생이란 사랑할 사람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으니까요. 선택할 힘이 있는 사람의 선택을 반드시 받을 수 있도록 생겨먹지도 않았구요. 양쪽의 시작과 끝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죠. 죄다 그렇지는 않을지 몰라도 대체로 경향성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이 흥미롭고도 괴상한 게임의 문제라면 가장 큰 문제죠.


그러니 누군가에게 사랑이 기꺼이 몸을 던질 ‘덕통사고’라면, 누군가에게는 불쑥 끼어든 틈입자가 됩니다. 건조하게 살았다면 마주치지 않았을 방구석의 곰팡이처럼. 무엇보다 완전 안전 원전 같은 견고한 세계에 익숙해 있던 사람에게 그것은 신종 바이러스처럼 치명적일 수 있겠습니다. 몰랐던 자신을 아는 것은 때로 잔인함을 동반하니까요. 허락을 구하거나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잠시 축축하고 눅진해진 순간에 은밀하게 자리를 잡는데 막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해준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망각의 축복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심장 없는 텅 빈 가슴 끌어안고 헤매고 있을까요. 평생 누구의 마음에도 머물지 못하고, 누구도 마음에 담지 못하는 사람이 된 채. 궁금하지만 이 이야기는 더는 굳이 들추지 않고 덮는 게 좋겠습니다. 가끔 퍽퍽한 삶의 물기를 위해 참신한 거짓말은 필요하니까요. 틈입자처럼 끼어들 다음 사랑을 위해서라도. 영원한 사랑이라는 세속의 환상에 대한 마지막 방어선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꽃을 부러워한 정원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