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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가좋다 Feb 04. 2021

장어의 맛

내가 기억하는 궁극의 장어!

 인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와 해수탕에 자주 갔었다. 당시 연안부두 근처에는 꽤 많은 해수탕이 존재했는데 해수가 피부를 부드럽게 하고 피로 회복에 좋다고 유명했다. 목욕탕 앞에는 수산시장이 있고 그 주변으로 오징어, 문어, 새우 등을 이용한 튀김 포장마차가 즐비해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아빠는 나를 차로 먼저 보내고는 꼭 장어 튀김을 사 오셨다. 바다가 보이는 도로 옆에 차를 세우고 큰 바위 사이로 밀려오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장어 튀김을 먹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장어튀김이 담겨있는 종이봉투를 반으로 주욱 찢으면 통째로 튀겨낸 장어가 샤라락 모습을 드러낸다. 가위로 숭덩숭덩 투박하게 잘려 노란 튀김옷 사이로 하얀 속살이 고개를 내밀고 그 옆에는 튀김을 찍어먹는 소스도 작은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었다. 청양고추가 얇게 썰려 고추씨와 함께 떠 있는 매콤한 간장소스였다. 어린 나이에도 장어의 맛은 알았나 보다. 가시 때문에 먹기 불편했음에도 뜨거운 튀김을 간장소스에 살짝 찍어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다 먹은 후 아빠는 항상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대고 "쉿. 집에는 비밀이야?" 하고 말했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도 목욕탕을 가자고 하면 과감히 컴퓨터를 껐다. 어느 날은 내가 먼저 아빠에게 목욕탕에 가자고 조르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장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장어는 스태미나에 좋고 최고의 보양식으로 유명한데 복날에 우리가 삼계탕을 먹듯 일본인들은 장어를 여름철 보양식으로 먹는다고 한다. 세계 장어의 70% 이상이 일본에서 소비가 되고 있다고 한다니 그 일본의 장어 맛이 사뭇 궁금해졌다. 일본에서는 장어를 숯불에 구워 간장소스를 입혀 덮밥으로 먹는 것이 대중적이다. 덮밥 소스도 오랜 시간 진하게 끓여낸 노하우의 결정체라서 어떤 식당에서는 장인이 죽어 장어덮밥을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자 남은 소스만 밥에 끼얹어 한정판으로 팔았다고 한다. 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일본 여행을 간다면 장어덮밥을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 




 고즈넉한 교토의 한 시골 마을. 노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은 가정집을 개조한 가게에 노부부가 소박하게 운영하며 테이블은 고작해야 4개 남짓. 할아버지는 장어만 구운 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고, 할머니는 본인만의 노하우로 차진 밥과 따끈한 장국을 알맞게 끓여낸다. 장어를 석쇠 사이에 끼고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연탄불 위에 살포시 얹어 놓는다. 앞뒤로 양념을 번갈아 바르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며 노릇하게 익어간다. 집게를 들고 석쇠를 탁탁 내리치면 양념이 불 위로 떨어지며 치익 소리가 난다. 할아버지는 익숙한 손길로 느리지만 노련하게 양념을 장어에 덧바른다.  직사각형의 도시락통 모양 밥그릇에 하얀 쌀밥을 얹고 그 위로 장어가 정갈하게 놓인다. 밥 위에 두 줄로 나란히 올려놓은 장어가 맛깔스럽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자 연탄불에 그을린 지방의 고소한 향이 몰려온다. 장국으로 살짝 목을 적신 뒤 쌀밥과 장어 한 조각을 수저에 올려 입에 넣었다. 굳이 씹지 않아도 혀로 살짝 힘을 주면 장어의 살이 으스러져 밥알 사이로 스며드는 듯했다. 부드러운 장어와 짭짤한 간장 양념이 입안에 조화롭게 맴돌며 간을 맞춰주었다. 이게 일본식 장어덮밥이구나. 흠잡을 곳 없는 노포의 변함없는 맛. 만족스럽긴 했지만 너무 기대했던 탓일까. 일본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함으로 포장하기엔 나에게 조금 부족했다. 


 한국은 소금이나 양념을 덧바른 장어구이가 일반적이다. 잘 달구어진 숯불에 갓 손질한 장어를 턱 하고 올리면 아직 근육이 살아있는지 꼬리 부분이 꿈틀꿈틀 뜨거운 열기에 반응한다. 잔인하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늦지 않게 굵은소금도 촥촥 뿌려준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장어 옆으로 간장 깻잎과 명이나물, 무 쌈이 차려지고 상추와 마늘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나는 채 썬 생강을 장어소스 그릇이 터질 만큼 욱여넣고 섞는다. 생강 한두 조각이 넘쳐 그릇 옆으로 떨어지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윽고 하얀 장어의 뱃살이 노르스름하게 익으면 나는 냉큼 한 조각 집어 소스에 적신 생강을 올리고 입속으로 직행한다. 탱글탱글한 장어의 식감이 즐겁다. 쌉싸름한 생강이 느끼한 장어를 단숨에 제압하고 두 번째, 세 번째 장어 조각을 입으로 집어 나르느라 손이 바쁘다. 분명 아는 맛인데 어째서 장어구이는 먹을 때마다 새롭고 특별하게 느껴질까. 장어덮밥과 장어구이 중 선택을 하라면 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장어구이이다. 오랜 시간 끓여낸 소스에 장인의 노하우가 담긴 장어덮밥이 조화롭게 장어의 맛을 살린다지만 장어의 맛은 장어가 살리는 게 아닌가? 숯불에 잘 구운 장어 한 조각에 채 썬 생강.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장어의 완벽한 조합이다.     


 주말마다 사람들이 붐비고 해수탕이 곳곳에 영업하던 연안부두는 이제 조용한 시골 수산시장이 되었다. 주변의 튀김 포장마차도 더는 볼 수 없지만, 장어를 먹을 때면 그 시절의 기억이 나의 향수를 자극한다. 투박하게 썰린 장어튀김 한 조각에 새콤한 간장소스를 찍어 한 입. 그때의 그 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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