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커 에세이 4 : 권현준
여행이 지루해졌다. 2년 전 11월 2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희망봉에 올랐다. 거센 바람이 모자를 날려버릴 듯 불었다. 한 손으로 모자를 누른 채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희망봉은 포르투갈 항해가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인도양을 가는 길에 처음으로 발견한 땅이자 모험가들이 목적지에 무사히 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곳이다.
남미에서 온 한 가족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숙연하게 기도를 했고,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던 홍택이 형은 눈물을 흘렸다. "이야~ 멋지다…." 나도 덩달아 감탄사를 내뱉는다. 하지만, 별 감흥이 없다. 뻔한 줄거리 속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가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여기 있나. 만인의 랜드마크가 나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그때쯤인가 어느 세계여행자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미국 서부 4300km를 종단하는 피시티(PCT∙Pacific Crest Trail)를 알게 됐다. 스토커처럼 피시티 하이커 종주자의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팔로우해 사진을 찾아봤다. 그들의 짧은 감상을 읽는 것만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물도 찔끔 났다. 'PCT'... '4300km'가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 여행하는 내내 가슴을 맴돌았다.
2018년 1월 4일, 아르헨티나 모레노 빙하 앞에 섰다. 억겁의 시간이 얼어붙은 얼음 장벽이다. 그런데 또, 그것은 나에게 별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피시티다. 나는 걸어야 한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여야 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처럼.
베트남을 시작으로 인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유럽을 떠나려는 찰나, 계획을 멈추고 피시티에 도전하기 위해 한국으로 바로 귀국했다. 피시티는 4~6개월 걸리는 장거리 하이킹이기 때문에 6개월 관광 여행 비자인 B1/B2 비자를 준비해야 했다.
5월 7일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 도착해 아웃도어 용품점에 들러 부족한 장비를 샀다. 피시티 출발지점인 멕시코 접경 도시 캠포(Campo)로 가기 위해 샌디에이고에 있는 한인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방은 정리돼 있지 않았다. 침대에 바퀴벌레 사체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수건은 침대 주변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아, 너무 즉흥적으로 온 것 아닌가.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산에서 조난당해 죽지 않을까. 곰이 공격하면 죽은 척을 해야 하나. 부모님께 손 편지를 썼다. 유서가 아니길 바랐다.
"도전에 성공할지 실패할지 저도 모르겠어요.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이겨내겠습니다."
나름 장거리 도보여행에 자신이 있었다. 2014년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파주 임진각까지 600km, 2015년 대한민국 전국 도보여행, 2017년 네팔 히말라야 토롱라 패스(Thorong La Pass, 5416m), 지난해에는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트래킹을 했다. 물리적인 고통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5월 9일 오후 12시 34분 대장정을 시작했다.
낮 기온 40도 가까이 되는 캘리포니아 뙤약볕 아래 어깨는 맥없이 처졌다. 장딴지와 허벅지에는 알이 배기고 근육은 빨래 짜듯 죄어 왔다. 가방에는 바윗돌이 들어간 듯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깨가 아파 배낭끈을 손으로 번갈아 부여잡고 허리를 숙이며 걸었다. 배낭 허리끈이 허리와 골반을 쓸어 상처가 생겼다. 첫날 오후 5시가 안 돼 운행을 멈췄다. 운행 거리 고작 9.1km.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미 서부 장거리 도보여행은 한국 국토대장정과 급이 달랐다. 아스팔트 평지를 걷는 한국과 달리 피시티는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해 걸어야 했다. 물 수급에 대한 불안감도 견뎌야 했다. 한국에서는 편의점에 가서 물을 사 먹어도 되지만, 이곳은 휴대전화도 안 터지고 주변에 상점 자체가 없다. 겨우 도착한 물 수급 장소에는 소금쟁이가 떠다니고 벌레가 빠져 죽어 있는 등 오염된 경우도 있었다.
피시티 종주는 2년간 세계일주를 함께한 친구 2명과 시작했다. 아프리카와 남미 여행을 하며 위험했던 순간들을 함께 이겨낸 동지들이었다. 하지만 보름 만에 이별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걷는 속도가 달랐다. 회복 속도도 같지 않았다. 상대방 운행 리듬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서로 알고 있었다. 의논 끝에 헤어지기로 했다. 며칠 휴식을 하면 서로 만날 수 있을 정도 거리를 두고 걷기로 했다.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이후에도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난 날은 많지 않았다.
팔할은 혼자 걸었다. 한인 하이커끼리 뭉쳐 텐트에서 밥을 먹고 모닥불을 피우는 모습을 볼 때면 '옆에 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인 피시티 하이커들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체방에는 서로 으쌰으쌰 하며 여행하는 사진이 올라 왔다. 그것을 볼 때마다 미치도록 외로웠다. 하지만 나는 한국 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휴대전화 메모장에 일기를 쓰며 외로움을 견뎠다.
출발한 지 한 달이 지나고, 험난한 산세가 펼쳐진 중부 캘리포니아 하이 시에라(High Sierra)구간을 지날 때쯤 나도 모르게 몸이 장거리 하이커의 것으로 바뀌고 있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새벽 4시 반이면 눈이 떠졌다. 다리 근육도 '딴딴'하게 모양이 잡혔다. 휴대전화가 꺼져 길을 잃어도 불안하지 않았다. 이 방향이면 맞겠지 하는 촉이 생겼다. 이때부터 하루하루 행복했다.
운행 33일째, 1130km를 걸어 사막 구간 끝이자 시에라 구간 시작점, 케네디 메도우즈(Kennedy Meadows)에 도착했다. 여러 외국인 하이커를 만났다. 일본에서 클라이밍 강사를 했다던 30대 후반 노부는 일본 전통 삿갓 모자를 쓰고 사무라이 문신 토시를 입고 걸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얼굴을 완전히 덮고 있어 에스키모 같았던 알래스카 출신 제레미도 만났다. 그들은 나보다 일주일 가량 늦게 출발했지만 나를 따라잡았다. 비결이 뭘까? 무게였다. 맥주를 마시며 친해진 베테랑 외국인 하이커들에게 내 가방을 점검해 달라고 부탁했다. 불필요한 것들을 거침없이 빼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배낭 레인커버와 우비 등 비를 막는 장비와 바람막이, 내복 등 보온성 옷들이었다. 비가 오지 않고 밤에도 따듯한 사막에서는 필요 없는 것들이다. 두 번째는 많은 양의 음식이었다. 세 번째는 텐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친구들은 말했다.
"너, 배낭에 든 짐보다 마음 속에 가득 찬 욕심부터 버려."
필수품목은 자체 제작했다. 미국 세탁소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일회용 비닐봉지로 우비와 레인커버를 만들었다. 야영지에서는 텐트 대신 비닐 돗자리와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에서 잤다.
밥도 적게 먹었다. 마을에서 토르티야에 초코릿 잼인 누텔라를 발라 랩으로 싸서 다녔다. 잼 통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즐겨먹던 참치와 스팸도 버렸다. 식사량 자체를 줄였다.
청결도 버렸다. 하이킹을 할 때 입고 있는 옷과 양말 2켤레, 경량 패딩 빼고 모든 옷을 최종 목적지로 보냈다. 배낭 무게가 4kg 정도 줄었다. 가벼워진 가방 덕분에 매일 40km를 걸을 수 있었다.
시에라 구간에 입성한 지 2주가 지났을 무렵 존 뮤어 트레일(John Muir Trail, 운행 49일째, 운행거리 1609km)에 올랐다. 시간은 오후 6시 10분,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2시간이 남아 있었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고 판단하고 눈 덮인 길을 올랐다. 중간에 만난 하이커들은 눈이 녹아 위험하니 내일 새벽에 같이 오르자고 했다. 하지만 앞뒤 재지 않고 '직진 본능'을 발휘했다.
무리수를 뒀나. 눈 덮인 길에는 발자국이 없었다. 그나마 발자국이 있는 곳은 길이 여러 군데로 길게 나 있었다. 휴대전화 GPS도 먹통이었다. 등산화가 눈에 젖기 시작하더니, 눈 아래 매복된 계곡에 양 발이 다 빠져 버렸다. 얼음장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골반까지 물에 잠겼다. 다시 배까지 잠겼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3000m가 넘는 고산에 계곡물이 숨겨져 있다니. 물살마저 강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당황하면 안 돼!"
큰소리로 외치며 뛰다시피 걸어 반대편 육지에 올라섰다. 침낭과 배낭이 젖었다.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무 추웠다. 다리가 얼 것 같았다. 젖은 레깅스를 벗어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반바지도 이미 젖어 있었지만 딱 붙어 체온을 흡혈귀처럼 빨아먹는 레깅스보다는 나았다. 웃옷도 벗어 맨몸에 경량 패딩만 입었다. 젖은 양말도 벗어 빨래하기 위해 구겨 둔 냄새 나는 것으로 갈아 신었다. 오후 6시 40분 존 뮤어 패스(Muir Pass) 정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먼저 도착한 하이커들로 가득한 대피소에 내가 머물 자리는 없었다.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십여 분 하산하던 중 또 발이 물에 빠졌다. 이번엔 하지만 먼저 도착한 하이커들로 가득한 대피소에 내가 머물 자리는 없었다. 종아리 근육 경련까지 났다. 비명을 지르며 드러누웠다. 체념을 하고 5분 정도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눈물이 글썽글썽 났다.
오후 9시, 10시, 11시 몸을 벌벌 떨며 걸었다. 랜턴 하나에 의지한 채 발자국을 밀어냈다. 새벽 1시가 돼서야 새로운 야영장에 도착했다. 한국의 경량 아웃도어 브랜드인 제로그램(ZEROGRAM)의 텐트가 보였다. 뭔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다.
부랴부랴 텐트를 치고 밥과 파스타가 섞여 있는 즉석식품인 크노스를 뜨거운 물에 불렸다. 치즈 두 개도 넣어 비볐다. 밥이 입에 들어가자 눈물이 나려 했다. 젖은 옷을 나무에 걸어 두고, 젖은 침낭에 발가벗고 들어갔다. 일기를 쓰려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눈물이 갑자기 터졌다. 야밤에 혼자 두꺼비처럼 '꺽꺽' 울었다. 위험한 상황에서 무모한 시도.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하지만 '해냈다, 성공했다'는 벅참도 밀려들었다.
'피시티 꽃'이라 불리는 시에라 구간을 끝내고 캘리포니아 북부 구간(운행 54일째, 운행거리 1863km)에 진입했다. 이곳은 다소 지루했다. 멋진 풍경이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길이 험해 성취감을 주지도 않았다. 뭔 놈의 모기는 왜 그리 많은지.
피시티 속 철인경기 '피시티 챌린지'에 도전했다. 챌린지란 하이커들이 목표를 만들어 게임처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24시간 챌린지'에 도전했다. 잠을 자지 않고 24시간 걸어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다. 나는 캘리포니아 북부의 에트나(Etna, 운행 76일째, 운행거리 2574km)를 출발해 세이아드 밸리(Seiad Valley)까지 80km 구간에 도전했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식욕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걸으며 초코바와 견과류를 먹었지만 식욕은 멈추지 않았다. 점심과 저녁 때는 먹어도 먹어도 계속 배가 고팠다. 구멍 뚫린 항아리 같았다. 다음은 수면욕이다. 새벽에 하이킹하다 텐트에서 단잠 자는 하이커를 본다. 또 다른 자아가 속삭인다. "마, 자라! 내일 아침에 출발해도 된다 아이가"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차디찬 새벽 공기에 웃옷을 벗고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걸었다.
캘리포니아 북쪽 오리건주는 '피시티의 고속도로'라 불린다. 길이 평평하고 높낮이가 완만해 빨리, 많이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리건 2주 챌린지'에 도전했다. 732km의 오리건 구간을 하루 52km씩 걸어 2주 만에 끝내는 것이다.
뜻밖의 변수를 만났다. 곤충의 습격이다. 먼저 모기떼. 걸을 때 모기 주둥이를 피하기 위해 춤추며 걷다시피했다. 대소변도 꾹 참았다. 야영장에 도착해서는 냇가에 물 뜨러 가는 사이 모기 20방 정도 물렸다. 모기를 피하려고 패딩을 입고 모자로 주변을 휘두르며 밥을 먹었다. 개미 습격도 받았다. 개미가 속옷을 파고들어 사타구니를 깨물어 대는데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2년 전 캄보디아 평양랭면관에서 북한 종업원을 만난 뒤 세계여행을 할 때마다 한반도기를 가지고 다녔다. 태극기와 인공기가 같이 그려진 깃발이다. 부산에 놀러 오겠다던 그이와 혹시나 재회할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피시티를 걸으면서도 옷가지는 버려도 항상 한반도기와 태극기는 배낭에 들어 있었다. 랜드마크나 중요 지점마다 꺼내 사진을 찍었고 한반도기를 궁금해하는 하이커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설명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날 때였다. 어떤 하이커는 북한을 보고 '미사일맨'이라고 조롱했지만, 대부분 하이커들은 우리의 통일을 기원했다. 한반도기를 펼칠 때마다 가슴이 후련했다. 하이킹 42일째 시에라의 실버 패스(Silver Pass)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에서 군생활을 했다는 20대 후반 하이커 로반이 그것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또, 강한 미국이 부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상 밖의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군사적으로 강한 것을 알아. 하지만 세계에서 참전 사망자 수도 아주 많은 편이야. 평화가 진짜 필요한 곳은 바로 미국이야."
마지막 관문인 워싱턴주다. 새벽 촉촉한 안개를 걷는 것이 좋았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젖은 나무 향과 차가운 공기는 나를 황홀하게 했다. 캐나다까지 800km, 20여일이면 끝이다. 곧 완주라니,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캐나다 국경 전 마지막 마을 마자마(Mazama, 운행 104일째, 운행거리 4170km)에 도착했다. 그런데 비보가 들렸다. 최종 목적지로 가는 길이 산불로 막혔다는 것이었다. 믿기지가 않았지만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가득 찬 연기가 뉴스 속보를 대신했다. 계획을 바꿔 마자마에서 히치하이크한 후 시애틀로 갔다. 렌터카를 빌려 캐나다로 간 뒤, 남았던 거리만큼 북쪽에서 거꾸로 걸어내려 갔다. 하이킹 106일째 최종 목적지인 모뉴먼트78에 다다랐다.
"바로 앞이 모뉴먼트야, 고생했어 친구."
먼저 완주한 하이커가 웃으며 말했다. 기쁘고 울컥하는 마음에 모뉴먼트를 향해 질주했다. 길 끝에 도착했다. 허무했다. 성취감도 밀려왔다. 눈물이 저절로 떨어졌다. 모뉴먼트에서 혼자 3시간을 앉아 있었다.
피시티 하이킹은 힘듦의 대명사 같다. 다만 완주했으니 뭐든 잘 할거야 라는 생각은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 또한 그것에 갇혀 있는 거니까. 하이킹을 마친 지 일 년이 다 돼 가는 지금 나는 그것은 그것대로 놓아주었다. 이미 길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 서로 다른 문화와 성격, 육체적 능력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화해, 깨달음 말이다. 겸손해졌다고 할까. 어쩌면 그것이 내가 세계 유랑을 하며 찾던 진짜 희망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