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커 에세이 3 : 박종훈
낯선 병명, 눈 통합 기능 장애(Eye team's ability dysfunction). 최근 2년 사이 롤러코스터 인생을 살았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배우겠다며 한국을 떠나 세계여행을 했다.
호주 동부 소 도축장, 아보카도 농장에서 일하며 '극한직업'을 체험했고 멜로 영화를 꿈꾸며 도전했던 장거리 도보여행은 교양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로 전락했다. 지금은 휴먼 다큐멘터리 '인간시대'를 혼자 찍고 있다. 가족과 친구는 희소병 원인을 '피시티'라 지목했다.
"너 피시티 때문에 눈 다친 것 아니야?"
"산속에서 그 고생을 하니까 눈이 남아나겠어?"
피시티 완주를 하고 캐나다에서 여유작작하며 책을 읽던 중 갑자기 눈 초점이 풀려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고, 눈을 비벼 봐도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눈을 몇 분간 감고 뜬 뒤에야 초점이 잡혔다가 곧 다시 풀렸다.
'피곤한 건가' 가볍게 여기고 중남미 코스타리카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상태는 더욱 악화했고 두통마저 생겼다. 남은 여정을 뒤로 한 채 귀국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눈통합기능장애'라는 희소병이 진단됐다. 세무사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2년 전 호주에서 일하고 여행하며 행복한 한 해를 보내다 다음 여행지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2013년 해남 땅끝마을에서 임진각까지 국토대장정 600km를 하며 첫사랑을 만났던 터라 도보 여행이야말로 사랑과 여행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산티아고 자료를 찾다가 보지 말았어야 할 영상을 보고 말았다. 미 서부 종단 4300km를 걷는 여행, 피시티에 관한 영상이었다. '산티아고보다 긴 거리를 걷다 보면 더 많은 경험을 하지 않을까?' 하여, 나는 걷기로 했다(물론 크나큰 착각이었다).
첫 스텝부터 꼬였다. 당시 호주 멜버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를 봤다. 미국 비자 담당 직원은 "호주에서 일한 경험이 있냐?" 물었다. 나는 당시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가지고 있어 "네(YES)"라고 대답했다. 그 말 한 마디에 직원은 서류에 '거절' 도장을 찍었다. 이유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미국에 가서 일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반 이민 정책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일주일 뒤 다시 인터뷰 신청을 했다. 모든 미국 일정을 파일로 인쇄해 영사관 직원에게 보여주며 왜 내가 미국에 가는지 설명했다. 결국 '승인' 도장을 받았다.
피시티 도전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일상적 여행, 그 일부라 생각했다. 완주한다고 인생이 크게 변하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였을까?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 고생길이 펼쳐졌다.
2018년 3월 12일 미국 최남단 멕시코 국경 마을 캠포에 도착했다. 다가올 고난과 역경도 모른 채 싱글벙글 웃으며 사진도 찍었다. 역시나 첫날부터 문제에 직면했다. 첫 번째, 피시티는 평탄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닌 산행을 하는 것이었다. 산행 경험이 전무한 나는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두 번째는 물이었다. 첫날 물이 있다는 곳을 향해 24km를 걸었는데 물이 다 말라버려 8km를 더 걸어야 했다. 레이크 모레나(Lake Morena, 운행 1일째, 운행거리 32.2km)에 도착해 간신히 물을 마셨다. 준비가 너무 없었다. 텐트도 한 번 쳐보지 않았었다. 첫날밤 텐트도 제대로 못 쳐 텐트를 이불처럼 덮고 잠을 잤다.
운행 3일째 라구나 산(Mt. Laguna, 운행거리 67km)에 다다랐을 때 태풍이 불었다. 하이커들은 산행을 멈추고 모텔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해질 수 없다는 생각에 산을 계속 올랐다. 그런데 웬걸, 바람이 너무 강해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나뭇가지가 꺾여 날아다니고 안개는 자욱해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추운 날씨에 휴대전화도 꺼졌다. 등골이 오싹했다. 전년도에 피시티 하이커 11명이 죽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운행 나흘째, 날씨는 개었지만 온몸에 낀 먹구름은 개지 않았다. 한 발자국 디딜 때마다 무릎이 아팠다. 무거운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다. 휴식을 위해 가까운 마을 워너 스프링스(Waner Springs, 운행 6일째, 운행거리 176.3km)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무게였다.
피시티에서는 무게는 곧 생명이다. 하이커들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한다. 어떤 하이커는 바닥에 까는 매트리스를 반으로 잘라 목에서 엉덩이까지만 깔고 잤다. 어떤 친구는 칫솔 대를 잘라 대가리만 가지고 양치를 한다. 배낭 무게 1g이라도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남자들은 속옷도 버리고 노팬티로 걷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나는 80L 가죽 배낭에 여벌 옷, 모자 3개, 소설책 등 쓸데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결국 입고 있던 반바지와 셔츠만 빼고 모든 것을 마을에 버렸다. 나중엔 상비약도 3알만 가지고 다녔다. '슈퍼 미니멀리스트'가 됐다.
이미 상해버린 무릎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나아지겠지 하며 계속 절뚝거리며 걸었다. 내리막길은 한 걸음 한 걸음이 지옥이었다. 몸이 너무 아파 주변 경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행도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매일 진통제를 먹었다. 결국 캘리포니아 남부 아구아 듈세(Agua Dulce, 운행 29일째, 운행거리 731.4km)에서 LA로 들어가 한의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휴식을 하며 피시티를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카톡"
그때 어머니가 카카오톡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머니: "종훈아…"
나: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 "삼촌이 돌아가셨다."
나: "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왜요!!? 교통사고 나셨어요? 지금 당장 한국으로 갈게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연락을 받은 시각은 오전 8시 30분. 가장 빠른 한국행 비행기는 오전 11시였다. 택시에 탑승해 공항으로 가는 길에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10시에 공항에 도착해 바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막둥이 삼촌은 41살로 나와 13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장남인 나에게 삼촌은 형 같은 존재였다. 나에게 여행을 가르쳐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삼촌은 초등학생이던 나를 데리고 인천 무의도, 경기도 화성 등을 데리고 다녔다. 지금도 홈페이지 회원 가입을 할 때 패스워드를 찾기 위한 질문인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에서 나는 '무의도'로 늘 답한다. 그런 삼촌이 죽다니. 믿기지 않았다. 버팀목이 무너진 것 같았다.
장례식장 흑백 영정사진 앞에 섰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진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기에,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나는 삼촌 이야기 한 번 들어줄 시간이 없었던가. 왜 소주 한잔 같이 기울이지 못했나. 내가 원망스러웠다.
장례식장에서 술만 마셨다.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삼촌을 납골당에 모시고 난 후 생각했다. '아 정말 이렇게 한국에 있다가는 미쳐버릴 수도 있겠다' 이틀 후 LA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도착한 지 5일째 되던 날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오며 배낭 머리 부분에 삼촌 이름 석 자를 실로 자수했다. 삼촌과 함께 걷고 싶었다.
'삼촌, 미국 여행은 안 해 봤지? 내가 미 서부 곳곳을 데려다줄게, 잘 지켜봐 줘. 같이 가 보자!'
트레일 복귀 후 첫날밤 캘리포니아 남부의 카사 데 루나(Casa de luna, 운행 38일, 운행거리 769km)에 도착했다. 그날 또 다른 사망 소식을 들었다. 한국인 피시티 하이커 한 명이 삼촌 기일에 하이킹 중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다. 그분의 트레일 네임은 '해피데이(Happy Day)'였다. 한인 피시티 단체 채팅방에서 늘 밝게 대화하시던 분이었다.
겁이 났다. 나도 죽으면 어떡하지… 다음날 걷지 않고 텐트에서 골몰히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배낭에 자수한 삼촌 이름 옆에 해피데이 선생님 이름을 함께 새겼다. 그리고 기도했다.
"선생님 이름을 제 가방에 자수하겠습니다. 대신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하늘나라에 가셔서 우리 삼촌에게 선생님의 해피 바이러스를 전달해주세요."
각오를 다졌다. 완주하리라. 이제 포기는 없다.
피시티에서 하이커들은 서로 특징을 관찰하고 별명을 지어준다. 이것을 트레일 네임(Trail Name)이라 부른다. 내 이름은 '스피디 곤잘레스(Speedy Gonzales)'다. 하이커들은 남미판 '톰과 제리' 만화영화 속 제리라고 했다. 하이커들은 크지 않은 체구에 빨리 걷는 내가 생쥐 같았나 보다. 사실은 트레일에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걷게 되면 잡생각이 떠오르고 삼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숨이 차도록 걸었다. 그래도 삼촌이 생각나면 소리치며 울며 걸었다. 산은 내 투정을 군말 없이 받아주었다.
"굿모닝."
매일 아침 하이킹 출발 전, 등산 스틱으로 삼촌과 해피데이 선생님 이름이 적힌 배낭을 톡톡 쳐 문안 인사를 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혼잣말을 한다. "오늘도 가 보시죠! 배낭 잘 붙들고 계세요!" 풍광이 좋은 곳이면 배낭을 내려놓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삼촌과 해피데이 선생님 영혼이 함께한 '단체사진'이다. 매번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할 수 있다. 아니 해낸다!'
5월 2일 출발해 52일째, 드디어 캘리포니아 남부 구간을 마치고 중부인 하이 시에라(High Sierra) 구간 출발점 케네디 메도우즈(Kennedy Meadows)에 도착했다. 하이 시에라는 '피시티의 꽃'이라 불리는 구간이다. 전체 구간 중 가장 예쁘면서 험난하기 때문이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태풍 예보와 지난겨울 내린 눈 때문에 하이커들이 운행을 멈추고 인근 지역에서 쉬고 있었다.
5월 16일 출발 66일째. 나도 휴식한 뒤 케네디 메도우즈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많았다. 폭설이 온다는 소식도 있었다. 내 비자 기간 6개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입산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할아버지 마법사인 간달프를 닮아 트레일 네임이 간달프인 친구와 미국 최고봉인 휘트니 산(Mt. Whitney, 해발 4421m)에 올랐다.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 밤 12시에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전날 내린 눈 때문에 길은 보이지 않았다. GPS를 보고 길을 짐작해가며 나아갔다.
고도가 급격히 올라가니 고산증으로 숨쉬기가 힘들었다. 암흑 속 들리는 거라곤 발자국 소리와 내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이긴다!" 소리치며 걸었다. 오전 5시쯤 정상에 도착했다. 5분 뒤 해가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감상에 빠졌다. 산악인들이 왜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을 동경하는지 얼핏 알 것 같았다.
피시티에서 재미있는 문화 중 하나는 랜드마크에서 누드사진 찍기다. 나는 휘트니 산으로 정했다. 옷을 하나 둘 빠르게 벗어던지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사진을 찍었다. 10초 동안 거대한 미국을 맨몸으로 정복한 느낌이었다.
겨울 산행의 또 다른 어려움은 야영이다. 얼음장 같은 추위에 선잠을 자야 한다. 피시티에서 가장 높은 구간인 포레스터 패스(Forester Pass, 해발 4009m)를 가기 전이었다. 우리는 패스 직전 캠프 사이트에 도착했다. 바닥은 온통 눈으로 덮여 텐트를 칠 자리가 없었다. 눈 치울 장비가 없어 손과 발, 가방으로 눈을 파냈다. 눈 밑에는 또 얼음이었다. 결국 얼음 위에 텐트를 쳤다. 가지고 있는 모든 옷을 입고 물을 끓여 물통에 넣어 끌어안고 잠을 잤다. 하지만 얼음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 무용지물이었다.
"모두 살아 있니!(Are you guys still alive!)"
다음 날 하이커들의 첫 인사말이다. 굿모닝이 아닌 서로의 생존 여부를 묻다니, 피식 웃음이 났다. 또 문제가 생겼다. 똥 싸고 오줌 누기 위한 공간이 없었다. 은폐할 곳이 없어 한 명씩 순서대로 텐트에 나와서 눈을 파고 똥을 쌌다. 출발 전 텐트 주변에는 하얀 종이에 노란색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듯 오줌 자국이 널려 있었다. 우리는 '옐로우링(Yellow Ring)'이 생겼다며 깔깔대며 웃었다. 눈 속 똥 지뢰가 숨어 있어 조심히 걸어야 했다.
캘리포니아 중부의 비숍(Bishop, 운행 72일째, 운행거리 1269km)을 지나고 해발 3690m 핀촛 패스(Pinchot Pass, 운행 77일째, 운행거리 1299km)를 넘고 있을 때였다. 그날은 해발 3686m 마더 패스(Mather Pass) 앞에서 캠핑을 하기로 했다.
눈이 녹아 발이 빠지는 '포스털링(Postholing)' 현상을 피하기 위해 새벽 6시부터 걸었다. 오전 10시쯤, 목적지 캠프 사이트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시간이 남아 더 걸었다. 2017년 여성 하이커 2명이 휩쓸려 죽었던 킹스 강(Kings River)을 건넜다. 강은 무사히 넘었지만 안전을 위해 등산화를 벗지 않아 등산화와 양말이 다 젖었다. 시간이 지나자 발에 감각이 사라졌다. 아차 싶어 신발을 벗어 마른 수건으로 발을 닦고 마사지를 했다. 해가 뜨자 포스털링 현상도 나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이 눈에 더 깊이 빠졌다. 보통 시간당 6km 정도를 걷지만 눈길은 1~2km밖에 걷지 못했다. 체력 소모도 컸다. 시간은 오후 2시를 넘었다. 토르티야와 소시지를 먹었다. '앵꼬 난' 자동차에 휘발유를 퍼붓듯 정신줄을 놓고 식사를 했다. 나도 모르게 3일 치 점심을 한 번에 다 먹어치웠다.
등산 스틱으로 얼음을 깨며 걸었다. 가파른 언덕에서는 돌을 붙잡고 걸었다. 미끄러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 발 한 발 신중히 확인하며 올랐다. 정상까지 단 15m. 그때 몸 절반이 눈 속에 푹 빠졌다. 길이 너무 가팔라 기어서 올라갈 수도 없었다. '떨어지면 즉사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등산 스틱으로 몸이 미끄러지는 것을 막았다. 그 사이 눈은 가슴 높이까지 찼다. 눈을 감고 기도했다. '도와주세요, 삼촌. 도와주세요, 해피데이 선생님.' 눈을 뜨고 아주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30초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20분 넘게 걸어서 빠져나왔다.
캐나다 국경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워싱턴주를 걷고 있을 때다. 캐나다 근방에서 큰 불이 나 트레일이 막혔다는 뉴스를 접했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 사이에 있는 피시티 종점 기념비인 모뉴먼트78을 봐야 하는데 허탈했다. 할 수 없이 우회하기로 했다.
캐나다로 가기 전 마지막 마을인 워싱턴주 마자마 빌리지(Mazama Village, 운행 171일째, 운행거리 4170km)에 도착했다. 와이파이를 연결해 인터넷을 확인했다. 이 무슨 일인가! 화재로 막혔던 길이 오늘 아침 열렸다는 뉴스였다. 할렐루야! 아 신이 도와주신 것가. 아니면 삼촌과 해피데이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건가. 기적 같았다.
캐나다까지 남은 거리 98.3km, 3일 정도 걸리는 거리다.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이 길을 시작할 때 10km, 100km를 지나가며 언제 끝이 오나 생각했는데 곧 그날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9월 3일 오전 8시, 출발 176일째. 마지막 도착지인 캐나다 국경 모뉴먼트78에 도착했다. 멀리 마을에서 챙겨온 맥주를 따 건배를 외쳤다. 해냈다!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하이커들끼리 포옹하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가방을 모뉴먼트에 내려 두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렀다. 삼촌에 대한 미안함과 완주에 대한 부담감만큼 눈물이 떨어졌다. 가방을 꼬옥 안았다.
"삼촌, 해피데이 선생님, 저 해냈어요. 그동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맘 편히 쉬세요.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제 인생의 피시티를 걸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