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커 에세이 5 : 신선경
'아침 일찍 웬 전화지?'
지난해 4월 14일 토요일 아침 7시 20분. 휴대전화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한가로운 주말 따스한 볕이 창문을 통해 환하게 비추는 아침이었다. 거실로 나가 식탁에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아침 일찍 어디지? '420-1024-XXXX' 낯선 숫자 조합, 국제전화였다. 광고전화인가 싶다가 혹시 몰라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LA 영사관입니다… 혹시?"
희미한 목소리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더니 끊겼다. 곧바로 전화가 다시 울렸다.
"LA 영사관입니다. 박선칠 씨 가족이신가요?"
"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남편이 사망하셨습니다."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왔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신이 몽롱했다. 잠깐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식탁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셨다. 메모지와 펜을 가져와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몸이 떨려 벽에 등을 기댔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펜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왜요? 어떻게 사망을 해요? 사고를 당하셨나요?"
"심장마비 같습니다."
내 남편 박선칠. 1953년에 태어나 66년간 이 세상에 살다 갔다. 19살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남편은 10살 위인 학보사 간사였다. 남편은 나와 첫 대면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나도 3년 동안 학생기자를 하며 남편을 졸졸 따라다녔다. 늘 나에게 자상했다. 그러다 정이 들었고, 결혼을 했으며 아이를 낳았다. 누구나 겪는 갈등, 기쁨, 행복을 나누며 동반자로 37년을 '딱' 붙어 살았다.
등산을 좋아했던 남편은 눈 앞에 산봉우리가 보이면 꼭 정상까지 올라가야 했다. 사업도 한눈 팔지 않고 한 길만 갔다. 세상을 떠나기 전 캠퍼스 저널과 대학문화신문, 공모전 전문 매거진을 발행했다. 지금이야 인쇄물이 많지만 30년 전만 해도 전국 대학마다 배포되는 우리 출판물에 기업들이 서로 광고를 하려고 했다.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고 사회로부터 칭찬받는 기업'을 사명으로 공모전 플랫폼 '씽굿' 등을 만들어 다양한 서비스를 했다.
남편은 3년 전 가을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카미노 순례길을 알게 됐다. 스페인과 프랑스 접경지대에 있는 생장 피데포르를 출발해 예수의 제자였던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약 800km에 이르는 프랑스 길이었다.
2017년 4월 4일부터 5월 15일까지 카미노 프랑스 순례길을 다녀온 남편은 그곳 북쪽 길을 가기 위해 공부를 했다. 해변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그리고 9월 21일 스페인 북쪽 해변을 따라 바욘에서 콤포스텔라, 묵시아까지 970Km 북부 순례길을 완주했다.
남편은 순례를 하기 전 해당 길에 대한 책과 다큐멘터리를 닥치는 대로 보고 읽었다. 실크로드 도보여행자이자 작가인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걷기 책 <나는 걷는다>와 <나는 걷는다 끝>, <떠나든 머물든>를 읽고 감동받았다. 레저를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려는 치열함이 자신과 닮았다고 했다.
남편의 순례길 닉네임은 '오 해피데이'였다. 남편은 길에서 만난 사람과 금방 친구가 되었고 사진을 같이 찍었으며 와인을 마시고 즐겁게 놀았다. 남편은 순례길 사진을 매일 나에게 보내주며 자신은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도 마치 그와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행복했다.
2년 전 겨울인 것 같다. 먼 길을 걷고 올 때마다 남편은 걸었던 거리만큼 가슴이 텅 비어 가는 것 같았다. 공허함을 느꼈다. 그리곤 어딘가 계속 찾아 걷고 싶어했다. 대학 관련 사업을 하던 남편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빠르게 변하는 매체에 적응하는 것을 벅차 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순례>를 보게 됐다. 다큐멘터리는 미국 서부지역 멕시코 국경 캠포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300Km를 걷는 피시티를 다루고 있었다. 남편의 눈은 반짝였고 도전과 모험심은 가동되기 시작했다.
남편은 결심이 생기면 늘 운동부터 시작했다. 북한산 둘레 길, 서울 집에서 양평 시골집까지 수 차례 걸으며 몸을 만들었다. 발에 물집도 잡히고 관절이 아파 고생도 했지만 컨디션을 조절해 점점 걷는 거리를 늘렸다. 배낭에 13kg 무게를 집어넣고 한 달간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돌았다. 준비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피시티 정보도 꼼꼼히 모았다. 미국에 3대 트레일인 애팔래치아 트레일, 콘티넨탈 디바이드 트레일, 피시티를 모두 종주한 같은 연배의 윤은중 씨, 피시티 책 <나를 찾는 길>을 쓴 김광수 군, <PCT하이커 되기>를 쓴 김희남 군 등 여러 하이커를 만나 정보를 얻었다. 출발하기 전 예비 하이커들과 단체 카카오톡 방을 만들어 의견을 교환했다.
하지만 피시티는 스페인 순례길과 달랐다. 거리도 2530Km나 더 길었고 사막과 산림을 지나 눈이 덮인 산과 강을 건너야 했고 때로는 곰과 방울뱀도 피해야 한다. 짊어지고 가는 장비와 먹을 음식까지 최대한 줄여야 했다. 집안 거실에는 산악 장비들이 계속 쌓여 갔다.
떠나는 남편은 나에게 말했다. 이제 일에서 손을 조금 떼겠다고. 그동안 최선을 다했고 한 길로만 열심히 뛰어왔다고. 그는 남은 생의 목표가 피시티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여보, 이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느끼고 싶어. 아직 보지 못한 자연을 보고 싶어. 하나님이 만드신 멋진 세계를 보는 것이 내 남은 생의 목표야."
"마이 와이프 이즈 엔젤."
지난해 4월 3일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남편은 그 동네를 3일간 여행하고 피시티 하이커를 도와주는 피시티 자원봉사자 '스카우트 앤 프로도' 집에서 3일을 묵었다. 남편은 피시티를 허락해 줘 고맙다며 나를 '엔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어.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고 말이야.
만약에 말이야. 예기치 않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난 후회하지 않아.
난 정말 이 세상 정말 멋지게 살다 간 사람이지."
남편은 눈이 와도 좋고 비가 와도 좋고 해가 떠도 좋다고 말했다. 늘 기뻐서 일부러 슬픈 기억을 떠올릴 정도라 했다.
4월 9일 남편은 걷기 시작했다. 더위에 힘들어했다. 40도 가까운 사막 기후에 마시는 물마저 수급하기 어려워했다. 이렇게 힘든데 내가 왜 걸어야 하냐며 푸념도 했다. 하지만 자연 속에 있는 것을 너무 행복해 했다. 화상 전화를 하며 나에게 엄지 손가락를 치켜들었다. 남편이 출발 전 여행 노트에 남긴 기록이다.
여정의 목표: 전체 구간 완주 / 나의 자서전 서설 *멍 때리며 간다~~
*4300km, 1일 9시간 = (149일)
1일 9시간 - 1시간 3.2km(1일 28.8km) 쉼 포함
149 X 28.84km = 4291.2km
"4/5(목) 그래 계속 도전하는 거야. 그래 계속 나가는 거야. 처음에는 힘든 게 좋아... 처음에 힘들어야 다음에 힘들지 않아. 처음이 좋으면 잘 안 가게 돼. 모든 게 처음에 힘들고 곤란함이.. 그 뒤를 보상해 주고.. 준비해주는 거야 그래, 잘할 거야.. !!"
"4/6(금) 12시 엔젤 픽업호텔데스크에서 기다린다. 12시 20분 왔다.. 엔젤집으로.. 다운타운에서 북으로 다시 간다. 동네 조용.. 깨끗하고 좋은 곳이다.. 집 소개받는다. 한글, 영문 있는 안내서 보임. 스커트.. 나랑 동갑 66이다.. 묻고 싶다.. 어째서 하게 됐는지. 몇 년째인가. 뭐하며 지냈고.. 벌이는.. 자식들은.. 힘들지 않나..저녁.. 마당 인근 잔디에 죽 둘러 앉아… 테이블 부페식이다… 스커트 프레(피시티엔젤, 스카우트 앤 프로도)도 함께 식사한다. PCT 설명하고"
남편은 하루 더 걷고 다음날 쉬었다. 그리고 12일 걷고 이튿날인 13일 정오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출발 56km 지점, 피시티 시작 4일 만이다. 남편이 숨지기 8시간 전 나는 그와 20분 정도 전화 통화를 했다. 미국 시간으로 아침 7시쯤이었다. 남편은 전날도 힘들어 20km밖에 못 걸었는데 오늘은 14km만 갈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스페인 카미노 순례길에서 평평한 길을 하루에 30~40km씩 걷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나는 힘들면 그만두고 와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피식 웃고 가던 길을 갔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주연아…"
"엄마, 잠깐만 무슨 일이야? 오빠 일? 아니면 아빠 일?"
"주연아, 아빠… 아빠가 돌아가셨단다."
늦둥이 딸은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한 나를 안아주었다. 큰 아들은 중국에 있어 전화로 소식을 전했다. 남편을 말렸어야 했나 뒤늦게 후회를 했다. 사망 소식을 듣고 사흘 뒤인 17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시신은 LA영사관과 현지 한인들 도움으로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 영안실로 옮겨져 있었다. 남편은 관에 편히 누워 있었다. "여보야! 왜, 여기 누워 있니?" 소리쳐 봐도 반응이 없었다.
유품은 배낭과 피 묻은 목도리였다. 바닥이 해진 배낭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불필요한 짐들은 다 버려 옷가지는 별로 없었다. 목도리 혈흔은 남편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넘어져 코에 피가 나는 것을 지나가던 하이커가 닦아준 것이었다. 미국 장례식장에 남편과 같이 걷던 한인 하이커들이 찾아왔다. 남편이 쓰러질 때 심폐소생술을 해줬던 직업 군인 출신 청년도 있었다.
귀국 전 산타모니카 해변 카페에 앉아 부고를 썼다. 낯선 분위기에 어색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쓰고 고치고를 반복했다. 남편이 피시티를 출발하며 푸른 하늘과 메마른 덤불 언덕을 배경으로 찍은 셀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됐다.
[부고] 항상 'Happy day'라 말씀하시던 박선칠 님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멋진 세상을 보시기 위해 미국 서부 PCT Hiking 여정을 따라가시던 중에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멋진 곳, 주님 품에서 쉬고 계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종주는 끝나지 않았다. 하이커들이 남편의 표식을 새기고 함께 걸었다. 백인 청년 팀은 남편이 적어준 "Tim~ PCT Your Friend, Happy Day~~"라는 메모를 가지고 함께 걸었다. 종훈이라는 한인 청년은 남편 이름을 배낭에 실로 수놓고 걸었다.
사망 당시 함께 길을 걸었던 한인 청년 아라 양와 우준 군은 남편의 팔찌와 손수건을 들고 걸었다. 2015년에 피시티를 완주했던 김희남 군은 피시티 하이커들의 축제인 피시티 데이(PCT DAY)에 참석해 'HAPPY DAY'라는 액세서리 배지를 만들어 하이커들에게 나눠줬다.
지난 4월 13일 남편 소천 1주기를 맞아 아들 딸과 함께 남편이 쓰러졌던 피시티 길을 찾아갔다. 혼자 세상을 떠나보낸 미안함 때문에 꼭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 들어간 뒤 40분 정도 더 걸었더니 구글 사진으로 보았던 큰 바위와 선인장이 보였다. 남편이 쓰러졌던 장소였다. 저기 저 멀리 산들이 겹겹이 보이고 구름 한 점 없는 푸르고 높은 하늘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곳이라면 남편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리 나쁘지 않았겠구나. 나와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아빠를 불렀다.
글 쓰고 있는 지금도 가슴이 아리고 아프다. 이제 남편이 남기고 간 사업체를 이어가야 한다. 큰 아들은 결혼해 아들을 낳아 가정을 꾸리고 있고, 아직은 아빠의 손길이 필요한 27살 딸은 나와 함께 지낸다.
나를 보고 엔젤이라던 남편은 먼저 엔젤이 되어 떠났다. 남편은 나를 처음 본 순간, 하늘색 모시치마 저고리에 머리를 하나로 묶어 곱게 나이든 내 모습을 상상했다고 한다.
"Happy Day 여보, 내가 그곳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당신이 떠나고 나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느껴집니다. 온 마음 다해 해왔던 그 많은 일들이 이제서야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었던 건지 이해가 가네요. 이제 제가 맡은 역할, 두 아이의 엄마로서 남은 길을 가려 합니다. 여보, 내가 그곳에 가기 전까지 멋진 하늘에서 구름 별 달을 보며 도보 여행하고 계세요. 저도 훗날 많은 이야기 가득 가지고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