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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켜진 TV 같은 대학생활, 여길 알고 달라졌다

하이커 에세이 6 : 박승규

by 히맨

6월 어느날 후덥지근한 강의실이다. 솔솔 부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교수의 강의를 듣는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무엇인가, 하얀 펜으로 칠판이 도배된다. 나는 기계처럼 그 말들을 노트에 옮긴다. 강단은 혼자 켜져 있는 텔레비전 같다. 뻔한 스토리의 TV 프로그램 보듯 무료하다.

처음 공대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군대를 전역한 뒤 관광경영학과에 들어갔다. 여행을 통해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의실 속 여행은 지루했다. 시간 낭비 같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까?'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까?'

해답 없는 질문에도 지쳐 있었다. 다만, 평범하게 살고 싶지는 않을 뿐이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세상 틀에 갇혀,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 출발 3일차,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웠다. 발바닥 전체에 물집이 나기 시작한 시점, 적응하기 전이라 그런지 뭔가 깔끔(?) 해보인다. ⓒ 박승규


듣도 보도 못한 숫자, '4300'


그때쯤이다. 도보 여행가 손성일 대장이 내가 살고 있는 충남 공주에 왔다고 연락이 왔다. 손 대장은 사단법인 아름다운 도보여행 이사장으로 국내 도보 여행길을 만들고 부산에서 유럽으로 이어지는 월드 트레일을 개척 중이었다. 4년 전 공주에서 서울까지 210km 도보여행을 함께 한 인연이 있었다.


작은 맥줏집에서 손 대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는 남자 두 명이 더 있었다. 손 대장은 자신이 개척 중인 트레일 충남 구간을 보수하러 온 하이커라고 그들을 소개했다. 미국 서부 '4300km'를 종단한 하이커라고 말했다.

'4300km?'

순간 숫자를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서울과 부산 왕복 5번 거리를 사람이 맨발로 걸었다고? 엄청난 거리에 망치로 머리를 맞는 느낌이었다.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300km를 완주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하이커 김광수, 김희남 씨였다.
그들은 새벽 산에서 일어나 토르티야를 먹으며 하루에 30~40km를 걸었다고 했다. 설산은 고통스럽도록 추웠지만 아름다웠다며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사실 어느 정도 강도인지 상상조차 안 갔다. 하지만 파노라마처럼 뭔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몸을 의자 뒤로 젖혀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하이커들의 모습까지 슬로비디오처럼 보였다.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걸어 돌아가는 길 10분. 세상이 달라 보였다. 매일 같이 지나던 길이었지만 공기 냄새와 하늘 색깔이 달라 보였다. 심장이 뛰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빨리 집에 돌아가 피시티가 뭔지 검색해야지. 모든 것이 가슴 벅찼다.

▲ 출발 전날 장비 점검 바닥에 비닐을 깔고 그 위로 장비들이 하나 하나씩 모이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백패킹 경험이 없기에 나름 꼼꼼하게 준비했지만 잡다한 것이 많다. ⓒ 박승규


'쿨' 하던 엄마, 문 앞에서 펑펑 울다


난 배낭에 모든 짐을 메고 산행을 하는 백패킹을 해본 적이 없다. 등산 스틱을 잡는 방법도 몰랐다. 먼저 한 일은 부모님 허락이었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던 부모님 앞에 앉았다.

"어머니, 아버지, 저 4300km 미 서부 종주길 피시티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경험 한 번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4000, 300? 음… 그래, 하고 싶으면 뭐든 해봐."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아버지는 산을 좋아했고 아들이 뭔가 해보겠다고 말하는 것도 처음 들으셨다. 경비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둔 돈 300만 원에다 부모님에게 400만 원을 지원받았다. 대학교 2학년까지 다니고 휴학을 했다. 피시티 완주자의 블로그를 보며 정보를 모았다. 실제로 걷는다는 상상을 하며 시뮬레이션했다. 어느새 집 거실에는 텐트와 침낭, 등산화, 휴대용 정수기, 삽 등 장비들이 쌓여갔다. 하루 마무리는 피시티 열풍을 일으킨 영화 <와일드>(Wild)를 보며 맥주를 마시는 것으로 끝났다.

출국날인 2017년 4월 5일 새벽 5시. 주변은 어둡고 조용했다. 배낭에 장비를 구겨 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어머니도 일찍 일어나 내 옆에서 장비를 무심히 만지셨다. 난 20kg에 육박하는 배낭을 어깨에 들쳐 메고 현관문에 섰다. 그제야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지시더니 눈물을 흘리셨다.

"아들아, 이거 꼭 가야 하니?"
"금방 하고 돌아올게요, 전화만 받으세요!"


가는 날이 장날, 첫 날부터 응급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샌디에이고는 낮 기온이 20도 정도로 날씨가 좋았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떨림과 설렘이 교차했다. 피시티 하이커를 돕고 있는 트레일 엔젤, 프로도와 스카우트의 집에 갔다. 그들은 샌디에이고 공항에서 나를 마중나와 있었다. 미리 이메일로 연락을 해 둔 덕택이었다.


집 안은 장관이었다. 하이커들이 풀어 놓은 배낭과 장비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들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들이 피시티 하이커구나. 왠지 모를 동료애가 생겼다. 인터넷 번역기를 이용해 말도 붙이고 바디 랭귀지를 써가며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해가 지자 스카우트와 프로도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도 옆에서 칼을 들고 아스파라거스를 다듬었다. 그런데 그때, 칼이 왼쪽 네 번째 손가락 끝을 스쳤다. 섬뜩한 느낌. 피가 주르르 부엌 바닥에 흘러내렸다. 당황했다. 분위기를 망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에 혼자 화장실에 빨리 들어갔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말도 안 통하고 당황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프로도가 바닥에 떨어진 피를 발견하고 따라와 상태를 물었다. 결국 응급 치료 시설에 가서 120달러 정도를 내고 상처를 봉합했다.


▲ 케네디 메도우즈 입성! 이 곳에 도착했다는 것은 나름 적응을 마쳤다는 의미를 가진다. 900km 이상 하이킹을 하여 도착했기 때문에 다들 자연인(?)의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균고도 3000m 이상 되는 시에라 산맥을 앞둔 시점이기도 하다. ⓒ 박승규



언어장벽으로 인한 외로움


그때부터 자신감이 확 떨어졌다. 숙소에 돌아오니 하이커들은 서로 웃고 놀고 있었는데 왠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내가 낙오자 같았다. 혼자 방구석에 가서 한국 친구들에게 연락하며 마음을 달랬다. 밤이 되자 베인 상처의 통증은 더 심했다. 부모님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4월 7일 오전 6시, 피시티 시작점 캠포로 향했다. 주변은 콘크리트 건물이 즐비한 도시에서 황색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해가 떠올랐다. 출발점인 캠포 모뉴먼트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세계 각지에서 온 하이커들은 각자 인증샷을 찍고 걷기 시작했다. 다 같이 모여 파이팅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함께 걸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동양인은 혼자. 말없이 걸어야 했다.

출발 후 사흘이 지나자 발바닥 전체에 물집이 잡혔다. 양 손에 잡은 스틱을 목발처럼 짚으며 한 발 한 발 신음하며 걸었다. 하루 30km 걷기는 포기하고 20km를 겨우 걸었다.

▲ 세상에 혼자 있는 기분. 출발 후 2주까지 물집이 나기 시작하면서 운행거리가 25km 정도로 줄어들어 남들보다 일찍 텐트를 치고 마무리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매 저녁 항상 혼자서 밤을 맞이했다. 혹독하게 적응을 했다. ⓒ 박승규


하루 종일 절룩거리며 걸었다. 하지만 대화하며 밥 먹을 친구 한 명 없었다. 찢어질 듯 아픈 발바닥과 먼지투성이 새카만 발만 보였다. 순간 눈물이 홍수가 난 듯 발등에 떨어졌다. 여긴 어딘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답답함에 화가 치밀었다. 온갖 욕을 하늘에 해댔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외로움이 더 힘들었다. 휴대전화에 남아있는 10장 남짓한 고향 사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랬다. 혼잣말을 했다. 할 수 있다. 이겨낼 수 있다. 오로지 가야할 곳만 바라봤다.

하이캉 한 달쯤 지나자 발바닥 전체에 잡힌 물집이 갈아엎고 새살이 났다. 한 달 동안 홀로 900km를 걸었다. 몸이 적응하니 마음도 편해졌다. 외로움도 적응됐다.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사색을 하며 일기를 썼다. 나무와 대화하고 도마뱀과 인사를 했다. 푸념이 사라졌다. 혼자 있기 달인이 돼 갔다. 어지간한 사건에 감정이 동요하지 않았다.

1000km를 걸었을 때 살은 15kg 이상이 빠졌다. 그만큼 자신감은 가득 찼다. 캘리포니아 중부 시에라 네바다 산맥 입구인 케네디 메도우즈(Kennedy Meadows, 운행 49일째, 운행거리 1123km)에 입성했다. 사막 구간이 끝나고 산악 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고도가 평균 3000~4000m였다. 하지만 불길한 소식이 들렸다. 백 년만의 폭설이 내려 시에라 길이 전부 눈으로 덮였다는 것이었다. 앞서 출발한 하이커의 실종 소식도 들렸다. 나는 설산 경험이 없었다. 대화도 잘 안 됐다. 휴대전화 GPS는 고장 난 상태였다. 고민 끝에 경로를 우회하기로 했다.
케네디 메도우즈 옆 도로를 따라 마을까지 걸었다. 2000m 고지에서 이틀을 걸어 하이웨이 395번 론 파인(Lone Pine) 지점까지 내려와 북쪽으로 걸었다. 시에라 산맥을 바라보며 걸었다. 날씨가 좋아지면 다시 올라갈 작정이었다. 도로에는 많은 하이커들이 나와 있었다.

▲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자연 속에서 일상이 이루어 질 수록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아스팔트에 누워 있으면 굉장히 따뜻하고 눈앞에는 멋진 하늘이 항상 연출된다. ⓒ 박승규



말똥 밭에서 잠자다


마을을 지날 때 노숙을 많이 했다. 하루는 캘리포니아 중부의 빅 파인(Big Pine, 운행 53일째, 운행거리 1325km)이라는 마을이었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편의점에서 콜라 한 캔을 사먹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땅거미가 질 때쯤 공원 화장실 뒤에 텐트 없이 침낭만 폈다. 19살 미국 남자 하이커도 곁에 와 누웠다. 그런데 새벽 물벼락이 떨어졌다.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없었는데! 허둥지둥 침낭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비가 아닌 잔디밭 스프링쿨러가 내뿜는 물이었다. 나도 장비도 생쥐꼴이 됐다. 미국 남자아이와 서로 쳐다보며 한참을 웃었다.


새벽에 도착한 마을 비숍(Bishop)에서는 화장실 변기 칸에 들어가 매트만 피고 누웠다. 지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런데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하더니 손전등으로 안을 확 비췄다.

"왜 여기서 잠을 자요? 감옥이라도 가고 싶은 거예요?"
"아...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바로 나가겠습니다."

경찰이었다. 결국 배회하다 시골 병원 뒤편 잔디밭에서 잠을 청했다. 꿀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데 뭔가, 께름칙한, 그것. 주변이 온통 말똥이었다. 이미 내 몸에도 냄새가 배였다. 저멀리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초보 하이커, 미 최고봉 오르다


6월 26일 오전 9시 미 최고봉인 휘트니 산에 올랐다. 산은 온통 눈천지였다. 경사는 75도쯤 되는 것 같았다. 앞사람 뒤통수를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발꿈치를 보고 걸어야 했다. 뒤를 돌아보면 배낭 무게 때문에 뒤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한 발씩 눈을 강하게 차면서 계단을 만들며 올라갔다.

드디어 정상. 48시간만에 산을 올랐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끝없는 산맥이 펼쳐졌고 저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하늘은 거짓말 같이 새파란 색이었다. 카메라를 나에게로 돌려 셀카 영상을 찍었다. 신이 된 것 같았다. 눈을 끓여 90센트짜리 미국 라면을 끓여 먹었다. 나에게 주는 상이자 하나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 휘트니 산(Mt. Whitney) 올라가는 길 원래의 길이 눈으로 덮여 곧장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하늘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 박승규


파도처럼 밀려오는 산불 피해 해변길로


오리곤주 초입 애슐랜드(Ashland, 운행 116일, 운행거리 2763km)를 지날 때였다. 하이커들은 근처에 산불이 크게 나 트레일이 닫혔다고 말했다. 나는 무시하고 계속 걸어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Crater Lake National Park, 운행 121일째, 운행거리 2934km)에 도착했다. 탄내가 났지만 견딜만 했다. 크레이터 파크 휴게소에서 캠핑을 했다. 그런데 다음날 사위가 누렇게 보였다. 재와 연기로 주변이 꽉 막혔다. 모래 폭풍에 갇힌 느낌이었다. 국립공원 직원들이 나와 대피하라는 공고문을 여기저기 벽보에 붙이고 있었다.

나는 결국 히치하이크를 한 뒤 우회로인 오리건 코스트 트레일(Oregon Coast Trail∙이하 오시티)로 갔다. 오시티는 800km길이의 해변 트레일로 피시티 오리건 구간과 길이가 같았다. 오시티는 바다의 사막이었다. 끝도 없는 모래 사장이 발걸음을 부여잡았다. 강한 소금 바람은 무거운 장비 맨 하이커들을 계속 밀어댔다. 파도 소리는 주변 모든 소리를 삼켰다. 밤이 돼서야 동행한 하이커들과 모닥불 앞에서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오시티를 3주간 걷고 마지막 구간인 워싱턴주에 입성했다.

▲ OCT(Oregon Coast Trail)의 색다른 매력 거친 바다의 모래바람과 끈적한 염분이 끝없이 나를 건드렸지만 그 것을 잊게 해주는 공간,파도 소리만 들리는 넓은 지구에 나 혼자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해줄만큼 웅장하고 광활했다 ⓒ 박승규


워싱턴주는 힘들었지만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었다. 하루 평균 고도 1000m를 오르고 내렸다. 산세가 가팔랐고 불규칙적이었다. 욕을 하며 아니, 산을 '경멸'하며 올랐다. 하지만 뒤돌아서 본 풍경은 숨이 멎을 듯한 절경이었다. 고즈넉하면서 웅장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길은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로 좁았다. 하루는 마부와 마주했다. 길을 비켜 주기 위해 좁은 길 비탈길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다 말 대열의 마지막 말에 내 가방이 걸렸다. 몸이 그대로 말에 끌려갔다. 좁은 길 옆은 낭떠러지였다. 순간 죽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말들도 놀라 날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말이 뛰면서 배낭 끝부분이 찢어져 풀려났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목적지에 다가올수록 쌓이는 공허함


캐나다 국경이 가까이 다가오자 마음은 침울했다. 10km를 남겨둔 마지막 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차분하고 덤덤했다. 굵직한 한숨이 가슴에서 뿜어져 나왔다. 목적지 2km 앞 캐나다 국경지대가 멀리서 얼핏 보였다. 지난 6개월 동안 이날만 상상했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멀리 나무 틈 사이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드디어 도착. 먼저 도착한 하이커 20여 명이 소리를 질렀다. 박수를 쳤다. 난 캐나다 국경 기념비인 모뉴먼트78을 만지고 뽀뽀를 했다. 한편으론 공허함이 몰려왔다. 내가 이걸 보려고 생고생을 했나. 이제는 어디로 걸어가야 하나.


▲ 워싱턴주의 칼날능선(Knife Edge) /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포인트다. 앞에 보이는 레이니어 산(Mt.Rainier)을 둘러싸고있는 구름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신선이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 박승규


피시티는 지독하게 힘들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모인 발자국들이 4300km라는 거리를 만들었다. 완주 뒤 나는 변했다. 노을을 즐길 줄 알게 됐고 나뭇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의 아름다움의 크기를 깨닫게 됐다. 생이 끝날 때 언제가 제일 행복했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지독하게 힘들었던 그때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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