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하얀 침묵, 백조의 밤〉

<하얀 침묵, 백조의 밤〉

by 박은아

15장

<하얀 침묵, 백조의 밤〉

– 25. 6월 12일, 탈린 오페라극장에서의 기억


<발트 3국 여행기ㅡ산다는 건, 어느 플루티스트의 깊은 호흡을 찾아서>


탈린의 여름밤은 유난히 늦게 찾아온다. 해는 길고, 공기는 맑으며, 하늘은 물처럼 느려진다.

그날도 그랬다.

6월 12일, 에스토니아 국립오페라극장 앞에서 나는 하늘의 색과 사람들의 표정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막이 오르고, 그가 등장했다. 지크프리트 왕자, 무대 위로 걸어 나온 그 순간, 나는 마치

’ 진짜 왕자가 강림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금발에 유려한 발레 동작과 표정 하나하나가 고전 속 왕자의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의 동작은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살아 있는 감정이었고, 모든 몸짓에는 왕자의 고민과 갈망, 그리고 눈부신 사랑이 담겨 있었다. 동작의 끝에서조차 망설임이 없었고, 그의 시선 하나에도 백조를 향한 진심이 묻어났다.


무대를 채운 건 무용수들만이 아니었다.‘에스토니아 국립심포니 오케스트라(Estonian National Symphony Orchestra)’의 연주는 차이콥스키의 선율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특히 백조의 호수 주제가 변주되어 돌아올 때마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어릴 때부터 알던 멜로디가 형상화되어 눈앞에서 춤을 추고, 그 몸짓이 완벽한 선율과 함께 귀로 들려오는 찬란한 경험이었다.

처음엔 나지막한 현악기로,

그다음엔 목관의 속삭임으로,

마침내 금관이 그 선율을 머금었을 때—그 음악은 더 이상 무대 아래의 소리가 아니라 무용수의 심장과 함께 뛰는 맥박이 되었다.

에스토니아 국립오페라극장과 발레단ㅡ

탈린 중심에 자리한 이 극장은

1913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은 전쟁과 점령의 시대를 견디며,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 정체성과 문화의 상징이 되어왔다.


에스토니아 국립발레단(National Ballet of Estonia)은

이 극장의 영혼과도 같은 존재다.

1939년에 창단된 이 발레단은

러시아 고전 발레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에스토니아만의 서정성과 절제를 품어낸다.

그들의 춤은 화려함보다 진실함을, 기교보다 내면의 움직임을 중시하는 듯 보였다.


그날 밤무대 위엔 두 개의 시간과 두 개의 영혼이 동시에 있었다.

19세기의 러시아 음악, 그리고 21세기의 에스토니아 젊은 무용수.

그 사이를 잇는 건 오직 하나—

예술이란, 결국 ‘살아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호흡이라는 것.


오데트와 오딜 – 흑과 백, 하나의 혼

오데트를 연기한 무용수는

고요한 백조 그 자체였다.

등장 순간부터 무대 위에 깃든 공기마저 달라졌다.

그녀는 고통을 품은 우아함을 보여주었고, 슬픔을 품은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애써 연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녀의 안에 오래 머물러 있었던 어떤 감정 같았다. 그녀는 춤추지 않았고, 그냥 오데트였다.

반면, 오딜로 바뀌는 장면에서는

마치 한 사람이 아닌 듯, 완전히 다른 얼굴이 펼쳐졌다.

도발과 유혹, 환희와 절망이

차이콥스키의 빠르고 강렬한 리듬 위에서 번개처럼 쏟아졌다.


나는 이 둘이자 하나인 오데트를 보며, 발트 3국의 마지막 여정인 이곳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백조의 호수란, 단지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과 어둠, 순수와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발트 3국 여행기ㅡ산다는 건, 어느 플루티스트의 깊은 호흡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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