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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올빼미 Jan 21. 2018

예술가는 직업일 수 없다

  80/20 법칙, 파레토 법칙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전체 시장의 20%의 참여자가 전체 수익의 80%를 가진다는 법칙입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자본가가 되기 위한 방법론에 대한 책들에서 아웃소싱, 레버리지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이 언급되죠.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법칙이 가장 극대화되는 분야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의 <2017 작품가격>에 따르면 2016년 국내 미술품 경매 총 거래총액(약 1700억) 중 약 60%가 국내 20명의 작가(이 중 10분만이 살아계십니다.)들로부터 발생했습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예술가들의 활동을 치환해본다면 더 기가 막힙니다. 출근 시간도 없고 퇴근 시간도 없습니다. 경제적 가치에 부합하게 제품을 생산해내지도 않습니다(행위예술, 헤프닝, 개념미술 등). 작품활동을 노동으로 본다면 투잡, 쓰리잡은 기본이겠네요.


존 케이지 <4분 33초>의 악보, 가치를 수치화 시킬수 있을까?


  예술가들이 과연 이런 절망적인 사실을 모르고 예술을 하는 걸까요? 예술을 하는 대학생들은 적어도 이 사실을 다 압니다. 부모님들과 자신의 꿈을 포기한 이들이 옆에서 너무나 절실하게 알려주시기 때문이죠.  굳이 수치로 설명하지 않아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살갗으로 느끼실겁니다(재료비, 등록금, 출판비 등). '그렇다면 그들은 그럼에도 왜 창작을 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비극을 만들어 냅니다.

  예술가들이 예술을 하는 이유는 '그냥' 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자본주의 세상에 '그냥'이라는 건 없으니까요. "너는 책을 왜 읽니?", "그냥 읽어요." 이런 프로세스가 이해받지 못하니깐요. 혹은 자신만의 '예술을 하는 가치'가 이해 받지 못할 것을 알기에 엄한데 힘 안쓰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일지도요. 

  또 다른 이유는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무 혹은 책임입니다.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의무와 책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됩니다. 돈을 받았기 때문에 의무가 생기고 직책이 주어졌기에 책임이 생기죠. 예술가들은 돈도 안받고 직책도 없지만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진지한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일수도, 사회 참여의 방법일수도, 미의 탐구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들은 그들만의 '진지한' 의무와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창작을 하는 이유, 즉 창작의 가치는 이렇듯 자족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의 논리에 몰딩된 다른 많은 가치와 달리 예술의 가치는 자본화의 과정에서 많은 갈등을 겪게되죠. 저는 여기서 살아있는 작가와 죽어있는 작가를 구분해서 동시대의 작가와 예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죽어있는 작가(어감이 이상하지만;;)의 작품은 수익 배분도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대적으로 떨어져 있을수록 작품가치의 윤곽이 쉽게 보이기 때문이죠.

  동시대 예술은 본질적으로 자본화, 즉 상품화 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디자인과 예술을 이 기준에서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하다고도 생각하는데요. 어느 시대건 아방가르드 정신과 개인적 경험은 예술을 떠받드는 주춧돌이고, 이런 특성은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방가르드(avant garde, 전위성)는 그 단어의 의미가 뜻하 듯 전위적입니다. 뒤틀고, 부시고, 해체하고, 의심하고, 도출하고, 도전합니다. '아방가르드함'이라는 가치가 햄버거 가격 정하듯 될리가 없죠. 어느 빅데이터나 인공지능도 이 작품이 갖는 미적, 사회적, 역사적 가치를 환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끽해봐야 지금 시장의 수요와 공급과 여타 많은 데이터로 소비자의 구매희망가격을 뽑아낼 뿐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아방가르드는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데 그 의의가 있기에 가격 책정이 패러다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미래에 발생될 가치를 그 패러다임 안에서 수치화하기는 어렵습니다(괴델, 하이젠베르크, 파이어아벤트의 논리와 유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최후의 만찬(Last Supper) by 틴토레토(Tintoretto), 아방가르드 정신은 포스트 모던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술은 개인의 경험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상품화가 어렵습니다. 갑자기 옛날에 정말 웃겼던 일이 생각이 나서 웃음이 터질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그럴 때면 어디가 됐든 그냥 웃어버리는데,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왜 웃냐고 물어보죠. 근데 이야기를 해줘도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아.. 그래?"하고 썩소를 짓고 끝납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저를 웃음 짓게한 뒷 배경들과 제 웃음 코드를 그들이 이해하긴 쉽지 않으니깐요. 이처럼 예술도 개인의 경험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사회적 가치의 합의인 '가격'이 이끌어지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예술가가 가난한 이유를 나열하는 게 응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앤디 워홀, 피카소, 달리처럼 생전에 작품의 가치를 인정 받고 경제적 성공을 이룬 작가들도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위에 언급한 아방가르드 정신과 개인적 경험을 감상자가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문법으로 창작을 하는 것이 위대한 예술가의 덕목일지도 모릅니다. 또, 써놓고 보니 예술을 하면 돈을 벌 수 없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증명한 것 같아 혹시나 기분이 안좋아지신 분이 있을수도...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사회적, 구조적 문제가 기저에 깔려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경제적 문제는 본질적으로 그들이 풀어나갈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문제이고 구조의 문제이며, 우리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작품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타협해선 안됩니다. '좀 더 잘 팔리게', '좀 더 잘 읽히게', '좀 더 예쁘게' 창작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인간을 위해 행하는 일을 방해해선 안됩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1점의 작품도 팔지 못했다고 하죠. 그런 그가 자신의 영혼의 동반자인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로 이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나는 예의를 모르는 인간, 건방지고 점잖지 못한 인간일까? 들어보렴, 내 생각에 예의는 인간을 향한 선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슴 속에 심장을 가진 모든 사람이 느끼는, 다른 사람을 돕고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고자 하는 욕구에 바탕을 둔 거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함께 살아가고 혼자가 되지 않으려는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이지. 나는 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것들, 그들이 관찰할 가치가 있지만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는 거다.
  (매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종종 내가 부자라고 생각한단다. 돈을 많이 가진 건 아니지만 나는 부자야. 왜냐하면 내 작품 속에서 나는 내가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할 수 있는 것, 나에게 영감을 주고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지.


Piles of French novels by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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