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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글씨 May 13. 2022

믹스커피, 아! 어른의 맛


어린 시절 미지의 세계였던 종이컵에 담긴 갈색의 액체. 나도 나도! 를 아무리 외쳐도 안돼, 이건 어른들만 먹는 거야라는 거절이 돌아오던 어른의 음료, 믹스커피. 사회에 발을 내딛으며 그 맛을 어렴풋 알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뉴하트라는 의학드라마가 꽤 인기였는데 지금은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단 하나 아직까지 선명한 부분은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방법이다. 당시 200 원하는 (지금은 얼마인지 잘 모르겠지만 최근 방문한 휴게소에서 자판기 커피 한잔이 500원이었다.) 밀크커피와 마찬가지로 200 원하는 우유를 뽑는다. 아시다시피 자판기 우유는 마치 분유 가루를 탄 듯, 혹은 설탕을 들이부은 듯 달달한 맛으로 많은 마니아 층을 보유하고 있다. 밀크커피와 우유가 든 종이컵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다 갔다 혼합하면 자판기표 커피가 완성된다. 

 밀크커피보다는 좀 더 옅은 갈색에 확실히 부드러운 목 넘김을 선사하는 자판기 커피는 공부가 하기 싫은 고등학생의 야자시간에 잠시나마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놀이였다. 내 기억 속 처음 믹스커피는 아마도 고등학교 매점 앞 200원짜리 자판기 커피, 그마저도 분유 맛이 강한 우유와 섞여 주인공들을 따라 하는 즐거움으로 마신 그 자판기 커피가 갈색 액체의 정체였다. 너무 달기도 하거니와 먹고 나면 입안이 텁텁하고 가끔은 x냄새가 나는 그 느낌에 바로 양치질을 하지 않으면 찝찝함을 견딜 수가 없어 믹스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다. 공유 배우님이 만들어내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카페가 나오기도 전인 그 시절의 나는 200 원하는 자판기 커피보다는 500 원하던 매점의 커피우유를 더 자주 마셨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는 더욱더 믹스커피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카페모카에서 라테를 지나 아메리카노에 눈을 뜬 이후였으며, 2500원 학식을 먹고 2000원 하는 학교 북카페의 혹은 대학가의 작은 테이크아웃 매장의 아메리카노를 사는 것이 일상이자 멋이었다. 가끔 기분을 내고 싶을 때는 4500원 백반이나 6900원 파스타를 먹고 4500원을 주고 브랜드 커피 혹은 지금보다는 대중적이지 않았던 개인 카페의 커피를 마시곤 했다. 진하게 내려진 에스프레소 샷이 주는 씁쓸하면서도 깔끔한 뒷맛이 나는 아메리카노를 하루에 두세 잔은 기본으로 마시는 커피 중독 시절에도 믹스커피는 도무지 손이 가질 않았다. 

 서울에서 출판 공부를 할 때도, 공기업 인턴이나 책방에서 근무하던 시절에도 드립 커피나 아메리카노, 라테를 즐겨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땐 명절 선물로 들어와 본가 찬장 어딘가에 항상 상비되어 있는 엄마들의 잇아이템인 블랙 커피를 마시던 것이 짧디 짧게 요약되는 나의 커피 역사다. 어린 시절 그렇게 궁금하고 마셔보고 싶었던 갈색의 액체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왜 마시는지도 모를 간편한 커피의 대용품일 뿐이었다. 평일 낮 일을 하다 꼭 머그컵을 두고 굳이 종이컵에 맥심을 타마시는 아빠도 이해하지 못했다. 종이컵의 믹스커피를 선호하는 것은 아직 더 맛있는 그러니까 아빠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발 같은데 나와서 혼자 다마시 지도 못하게 하는 주제에 5000원이나 하는 카페의 커피 맛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오만이었는지. 


 27살의 여름, 그토록 바라 왔던 회사에 취업을 하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중 하나는 휴게실에 있는 커피머신이다. 카페를 갈 수도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취향의 원두로 만든 커피는 아니더라도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 정도는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출근하고 한잔, 점심 먹고 한잔, 오후 3시쯤 한잔, 동기가 잠시 찾아와서 한잔, 부장님의 제안에 한잔(사실 이때가 제일 기쁘다! 당당하게 일을 안 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아침이 시작되지 않는 기분마저 느끼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는건 직장인의 포션같은 것이었고, 너나 할거 없이 모두 커피를 즐겼지만 부장님은 종종 믹스커피를 드셨고 나는 그게 꽤 신기했다. 

 하루 종일 숫자를 마주 보며 시름을 앓던 어느 오후, 동기가 믹스커피 한잔을 건네주었다. (사실 우리 팀은 팀 비로 믹스커피를 주문하지 않아 믹스커피가 굉장히 귀했고, 내가 마시지는 않더라도 보통 구할 수 있으면 구비해두었다가 팀 분들에게 나눠드리곤 했다.) 너무나 피로하고 당이 떨어졌다는 게 무슨 기분인지 완연히 느낄 수 있던 오후 믹스커피를 마셨다. 굳이 텀블러를 두고 종이컵에 타 와 손에 전해지는 뜨거움을 느끼며 첫 모금을 마시던 순간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던 응축되어있던 단맛과 카페인 그리고 뜨거움의 온기는 속에 쌓여있던 답답함을 순식간에 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원래 뜨거운 것을 잘 마시기도 하지만, 그 뜨거운 커피를 10초 컷으로 원샷한 후 나는 믹스커피의 맛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믹스커피, 종이컵에 탔을 때만 그 완벽한 맛과 분위기를 재현하는, 뜨거움과 달달함과 정신을 번쩍 깨어나게 하는 묘한 맛을 가진 갈색의 액체는 단연코 어른의 맛이었다. 온도를 맞춘 깔끔한 잔과 향으로 즐기며 원두의 분쇄 방법 등을 따져가며 마시던 커피와는 다른 특별한 맛이 믹스커피에 있었다. 오후 3시가 넘어가는 사무실에서 종이컵에 타마시는 믹스커피에는 눅진한 하루를 날려주는 힘이 있었고, 무엇보다 야근이 하기 싫어 5분도 아까운 시간에 단 20초면 완성되는 간편함이 있었다. 취향에 따라 물을 조절해 커피의 진하기 까지 조절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완벽한가! 이제야 나는 어른이 즐기는 커피의 맛을 깨달은 것 같다. 아마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영영 몰랐을 이 어른들이 마시는 갈색의 액체는 어쩌면 사발 같은 곳에 나와 천천히 즐기며 마셔야 하며 5000원이나 하는 커피가 결코 낼 수 없는 그 만의 맛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피로하고 지친 오후 나는 서랍에 숨겨둔 믹스커피를 꺼내 어른의 맛을 곱씹어 본다. 그리고 그 완벽함에 감탄하며 이제 내가 어른 인가 하는 자아도취에 빠지기도 한다. 이 치명적인 믹스커피의 높은 당을 걱정하는 것 또한 어른들의 맛이라는 생각을 하며, 요즘의 믹스커피들은 이런 어른들을 위해 설탕 조절 부분 같은 것들을 만들어 놓더라도 이상하게 커피를 탈 때는 남은 하나까지 탈탈 털어 넣어 버리고 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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