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타까운 이야기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는 백제 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 관음사가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내륙에 있는 관음 성지이자 백제 시대 사찰로는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이곳에는 5개의 이야기가 있다, 그중에 첫 번째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안타까운 이야기다. 관음사 기록과 위키 등에 의하면 관음사는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건물이 80여 동에 달하는 큰 사찰이었으며, 1374년(공민왕 23년)까지 다섯 차례 중건되었으나 1597년의 정유재란으로 원통전만 남고 전소되고 말았다. 이후 재건되었으나 1832년에 큰 홍수가 나 절의 규모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만 해도 아직 20여 동의 건물이 남아있었고 곡성과 화순, 담양 등에 논밭 16,000마지기를 소유한 대사찰이었다. 그런데 1953년, 인근의 백아산이 빨치산의 소굴이라는 이유로 국군이 관음사 모든 전각에 불을 질러 절 전체가 소실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이 사건으로 당시 국보 제273호였던 원통전이 전소되고 내부에 있던 국보 제214호 금동관음보살좌상도 보살의 얼굴 일부만 남기고 사라졌다. 전각에 보관되고 있던 괘불도 다른 기록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때 화마로부터 살아남은 것은 본체에서 멀리 떨어진 입구의 금낭각과 돌로된 문화재 몇 점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 불타고 남은 보살의 얼굴 또한 사찰에 금동관음보살상의 두상이 있다는 소문으로 도난당하는 피해를 입어 어느 보살이 한 고물상에 되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국군의 방화로 소실된 원통전이 공민왕 때 5번째로 중건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군에 의해 방화 피해를 입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최고(古)의 목조 건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에 피해 입은 사찰이 남한지역에만(주로 호남과 영남지역에) 180여 곳에 이르렀지만, 전쟁 이후에도 사고피해조사나 철저한 원인조사 한번 이뤄지지 않고 묻혔다. 관음사도 지속적 민원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피해 보상을 받지 못하고, 대부분 자력으로 복구하였다. 현재 관음사의 원통전는 1954년에 인근 대은암(大隱庵)에 있는 건물을 옮겨온 것으로 원래의 원통전과는 생김새가 다르며, 대웅전과 삼존불상은 비교적 최근인 2024년 4월에야 많은 사람들의 시주로 제자리를 찾았다.
아래 사진은 얼굴만 남은 보살상과 일제가 찍은 원래의 금동보살좌상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