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 후 처음 만나는 겨울 속 도사리는 음모
새벽녘에 또 바르르 떨려 잠이 깼다.
며칠째 이런다. 홑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기며 오늘은 거위털 이불을 꺼내야겠다 다짐했다. 겨울이 노크한다. 스미듯 느껴지는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은 훅 들어오는 불청객 같지만 이번 겨울은 내겐 처음 맞는 그것이라 설렌다. 명예퇴직 후 처음의 봄, 처음의 여름과 가을을 지나 드디어 처음 겨울을 곧 만나게 되니 말이다.
겨울 추위가 기세를 떨치던 3월, 내 처음의 봄에 혼자 발리로 떠났다. 2주 동안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이었기에 딱히 여행이라 칭할 수 없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 속에 있자니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으로 진정한 휴식이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가족이 그립지도 않았다. 곧 일상 속으로 돌아오면 지겹게 볼 가족이니 말이다.
내가 지낸 숙소는 초록의 나무와 식물로 가득한 저렴한 호텔이었는데 서양의 은퇴 생활자들로 가득했다. 동양인이라곤 나 하나였다. 그들은 주로 부부 여행자였는데 나처럼 혼자 온 여행자도 간혹 눈에 띄긴 했다. 조식을 먹으러 아침 일찍 식당으로 가면 식당 직원과 여행자들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하나같이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처음엔 참 정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했는데 여행자들 대부분은 거의 한 달 이상 장기 투숙하는 이들이어서 정이 쌓일 수밖에 없음을 며칠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소박한 아침식사를 한 후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곳은 바로 야외 풀이었다. 일반 여행자들 같으면 시내투어를 하러 나간다든지 무슨 해양 액티비티를 하러 나가서 호텔은 텅 비어 있겠지만 이곳은 달랐다. 발리의 사누르 지역은 유럽 은퇴생활자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라 다른 지역과 달리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밀물 썰물 같은 타 지역과 달랐다.
나 역시 투어는 애초에 염두에 없었으므로 아침식사를 한 후 방에서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고 엉기성기 짠 그물 가방 속에 읽을 책과 아이패드와 에어팟을 쑤셔 넣은 후 야외 풀로 내려갔다. 아쉽게도 큰 나무 그늘이 있는 명당자리는 벌써 다 선점이 되어있었다. 세 군데의 야외 풀이 있지만 내 방에서 바로 보이는 풀장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게다가 거의 부부 여행자들인 탓에 초로의 백인 커플들 속 동양 솔로녀는 무언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매일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점점 명당자리를 내 자리로 만들며, 나만의 공간을 구축했다.
어떤 남자는 종이신문의 퍼즐을 매일 진지하게 풀고 있었다. 어떤 여자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보기만 해도 더운 털실로 무언가를 짜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엉킨 실타래를 인내심 있게 풀며 실이 더 엉키지 않게 아내가 뜨개질을 하는 내내 털실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로맨틱하던지 말이다. 주로 내 옆 썬베드에는 혼자 여행 온 미국여자가 정말 열심히 매일 글을 쓰고 있었다. 두꺼운 노트에 가득한 손글씨를 보니 그녀가 작가이든 혹은 작가가 아니든 간에 그 집중력과 일상심이 대단해 보였다. 나는 가져간 책을 읽는 척만 했지 실은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서양인들처럼 썬베드에 누워 책 읽는 시늉은 했지만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점심은 뭘 먹을까, 저녁은 또 어디서 뭘 먹지.. 주로 이런 생각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머릿속 먹을 걱정을 떨쳐내려는 듯 풀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햇볕에 달구어진 몸을 식히곤 했다.
나는 대부분의 은퇴생활자들이 그러하듯, 석양이 내릴 무렵 엉금엉금 움직였다. 사누르 비치 따라 길게 나있는 산책로를 걸으면서 그날그날 마음 내키는 카페나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아 빈땅 맥주와 나시고랭을 주문해서 먹었다. 술을 못 마시는 내가 빈땅 맥주를 시킨 건 그저 싼 맛에 부려보는 멋이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그저 나인 채로 나만을 챙겨주는 내 시간이 한없이 좋았다.
그렇게 2주를 지낸 후 집으로 돌아올 때 내 마음속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 맞는 이 겨울엔 사누르 저렴한 그 호텔에서 한 달을 살아보리라는 계획인데 남편도 아이들도 모르는 계획이니 이것은 음모가 맞다. 겨울 여행의 모든 순간을 처음처럼 귀하게 여기겠다는 결기도 음모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