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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노래 Oct 30. 2024

기다려, 사누르!

명퇴 후 처음 만나는 겨울 속 도사리는 음모

 새벽녘에 또 바르르 떨려 잠이 깼다.

벌써 며칠째다. 홑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기며 오늘은 거위털 이불을 꺼내야겠다 다짐했다. 겨울이 노크한다. 스미듯 느껴지는 다른 계절과 달리 겨울은 훅 들어오는 불청객 같지만 이번 겨울은 내겐 처음 맞는 그것이라 설렌다. 명예퇴직 후 처음의 봄, 처음의 여름과 가을을 지나 곧 처음 겨울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남은 겨울 추위가 맹렬한 기세를 떨치던 지난 3월 2일에 혼자 발리로 떠났다. 2주 동안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들이었기에 딱히 여행이라 칭할 수 없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들 속에 있자니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으로 진정한 휴식이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 가족은 물론 그립지 않았다. 

 내가 머물렀던 사누르 지역의 저렴한 숙소는 서양의 은퇴 생활자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주로 부부 여행자였는데 나처럼 혼자 온 여행자도 간혹 눈에 띄긴 했다. 조식을 먹으러 아침 일찍 식당으로 가면 식당 직원과 서양 여행자들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하나같이 서로 이름을 부르며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처음엔 참 정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싶었는데 대부분이 한 달 이상 장기 투숙하는 이들이어서 정이 쌓일 수밖에 없음을 며칠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소박한 아침식사를 한 후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곳은 바로 야외 풀이었다. 젊은 여행자들이 많은 곳이었다면 오전에 시내투어를 하러 나간다든지 해양 액티비티를 하러 나가기에 오전의 호텔 풀장은 한산하겠지만 이곳은 달랐다. 나도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엉기성기 짠 그물 가방 속에 책 한 권, 아이패드와 에어팟을 쑤셔 넣은 채 야외 풀로 내려갔지만 아쉽게도 큰 나무 그늘이 있는 명당자리들은 벌써 누군가의 비치 타월로 선점이 되어있었다. 첫 며칠은 나무 그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선베드만이 내 차지였다. 거의 부부 여행자들인 초로의 백인들 속 나는 무언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매일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점점 명당자리를 내 자리로 만들며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구축했다. 게다가 주위를 둘러볼 여유까지 생긴 내겐 그곳에서 거의 매일 만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로웠으며 이것은 마치 내 여행의 이유 같았다.

 거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초로의 한 백인 남자는 종이신문 속 낱말 퍼즐을 매일 진지하게 풀고 있었다. ‘저 신문은 대체 어디에서 구했을까, 혹시 지난 신문들을 집에서 한 뭉치 가져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나도 참 한심한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 한심함이 좋았다. 그리고 호주 억양의 한 부부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깡마른 몸집의 아내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보기만 해도 더운 털실로 무언가를 짜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엉킨 실타래를 인내심 있게 풀며 실이 더 엉키지 않게 아내가 뜨개질하는 내내 털실을 잡아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로맨틱하던지 말이다. 주로 내 옆 선베드에는 혼자 여행 온 미국 여성이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있었다. 두꺼운 노트에 가득한 손글씨를 보니 그녀가 작가이든 혹은 작가가 아니든 간에 그 집중력과 일상심이 대단해 보였다. 고백건대 나는 서양인들 흉내 낸답시고 선베드에 누워 책 읽는 시늉만 했다. 점심은 뭘 먹을지, 저녁은 또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 하는 생각들로 책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머릿속 먹을 걱정을 떨쳐내려는 듯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햇볕에 달구어진 몸을 식히곤 했다. 

 나는 대부분의 여행 생활자들이 그러하듯 석양이 내릴 무렵 엉금엉금 움직였다. 사누르 비치 따라 길게 나 있는 산책로를 걸으며 그날그날 마음 내키는 카페나 레스토랑 야외 테이블에 앉아 빈땅 맥주와 나시고랭을 주문해서 먹었다. 술 못 마시는 내가 빈땅 맥주를 시킨 건 그저 싼 맛에 부려보는 멋일 뿐이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그저 나인 채로 나만을 챙겨주는 내 시간이 한없이 좋기도 했거니와. 

 2주 후 돌아오는 비행기를 탄 내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명퇴 후 처음 맞게 될 이 겨울엔 사누르에서 여행 생활자로 한 달을 살아보리라는 것이다. 아, 나의 세상 무해한 이 음모가 부디 성공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어느 날 어딘가에서 그 무용담을 써 내려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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