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하여(약혐주의)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아마 볼펜으로 무얼 끼적이다 글씨를 틀렸던 것 같다.
“차카차카차카”
아무리 흔들어도 화이트가-그 시절엔 수정액을 ‘화이트’라 불렀다. 또한 수정테이프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때였다-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펜 내부에 찰랑거리는 느낌이 있는데 꾹꾹 누르면 종이엔 수정액 대신 심자국만 깊게 남았다. 그냥 책상에서 일어나 문방구를 가서 새 수정액을 사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사고회로가 조금 이상하게 돌아갔다.
내 방의 보통 커터칼로 수정액 펜 자르기를 시도 했다. 얇은 칼날은 생각보다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수정액을 들고 부모님 방으로 건너갔다. 그곳 서랍 구석의 꽤 두꺼운 커터를 찾아냈다. 엄마는 요리하고 있었던가? 남동생은 뭘하고 있었더라? 열두 살 짜리가 무시무시한 칼을 들고 있는데 막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미 첫 번째 시도로 홈이 나 있으니 쉽게 자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동시에 수정액을 흘리기 싫었다. 그런 논리로 나는 왼손으로 펜을 들고, 오른손의 커터를 휘둘러 펜을 그대로 쓱싹 잘라버렸다. 커다란 커터날은 역시 잘 들었다. 펜이 한번에 잘렸다. 그리고 펜을 잡고 있던 왼손 검지 손가락 일부도 같이 잘렸다.
무언가 날카로운 아픔이 온몸을 감쌌다. 본능처럼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으헝헝”
곧이어 절단면으로 피가 스며들듯 올라왔다. 놀라서 달려온 엄마는 무슨 일이냐고 묻다 놀라 줄줄 흐르는 피를 휴지로 감쌌다. “손가락을 잘랐어..” 우느라 뭉개진 발음을 어떻게 알아들으신 건지 둘 다 잠옷 바람으로 거리를 나섰다. 초가을이라 저녁 날씨가 꽤 쌀쌀했다. 빨갛게 물든 휴지 뭉텅이를 부여잡고 우리는 동네 종합병원 쪽으로 뛰다시피 걸었다.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전혀 없는 건 아니었나 보다.-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이쪽이 더 이성적이지 않은 것 같다- 엄마는 그제야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이 떠올랐는지 병원 응급실 바로 옆에 위치한 약국을 먼저 들렀다. 약사 아저씨는 걷어낸 휴지 틈새를 보시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고 아주 잘렸네. 이건 여기서 안 돼요. 응급실 가세요”
들어가는데 용기가 필요했던 응급실의 반응도 약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급하게 오느라 잘린 손가락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워낙 끄트머리니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가루 지혈제만 뿌린 뒤 휴지 대신 붕대를 칭칭 감아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고를 친 자리에는 약간의 핏방울과 말라버린 수정액과 손톱이 달린 채 나동그라진 손가락 끄트머리가 남아있었다. 분명 내 몸의 일부였는데, 이게 떨어져서 이 사달이 난 건데 하얗게 질린 그 살갗이 낯설다 못해 징그러웠다. 바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다친 뒤 일주일 동안 욱신거림이 항상 나를 따라 다녔다. 붕대를 감아 ET처럼 둥글넓적해진 왼쪽 검지는 세수를 할 때도, 물건을 집을 때도, 코를 팔 때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곤 했다. 그 후 욱신거림이 잦아들고 집에서 혼자 처치할 수 있게 되자 이젠 냄새가 뒤따랐다. 빨간약 때문에 주황색으로 물든 쭈글쭈글한 손가락은 씻지 못해 찌든 냄새-깁스를 해본 사람은 알 테다-를 더해 이질감을 더했다. 가만히 보다보면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몇달 후,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비스듬한 모양새로 어색하게 남았다. 세수할 때, 물건을 집을 때, 코를 팔 때. 집게손가락은 자신은 그런일을 할 재목이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다른 손가락 뒤로 빠지고는 했다. 지금 두손을 펴고 보니 어느 손가락이 다쳤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건 이후 이십오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제 왼손 검지와 좀 친해졌지만 잘 쓰지 않는 버릇은 여전하다.
때때로 몸은 낯선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아토피가 있던 팔꿈치도, 녹내장이 온 눈도, 자주 고장나는 신장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당연하게 괜찮았던 부위들이 하나둘씩 존재를 드러낸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고. 이런게 내몸인걸 나만 몰랐을 뿐이라고. 마치 싸우고난후 진정한 친구가 되듯이 병원에 다녀온 후에야 나의 몸을 제대로 인식하게된다. 언젠가 내 몸의 모든 부위와 친해질 날이 오긴 할까? 그때는 아마 내가 눈감는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