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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Apr 12. 2021

주황빛 김치

'오뚜기 푸드 에세이 공모'에 응모한 글입니다.

가끔 빨간 김치를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둘째 출산 전 생긴 갈등으로 인해 연락을 끊은 지 오래지만, 김치만 보면 언젠가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가 자동응답기처럼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재생되기 때문이다.

 “엄마, 나 어렸을 때 말이야. 우리 집 김치는 왜 주황색이었어?”

 “그거야 그 인간이 생활비를 안 줘서 고춧가루 아끼느라 그런 거지.”


나는 그때까지 엄마가 김치를 못 담그는 줄만 알았다. 내 기억에 우리 집 김치는 항상 가을 단감처럼 밝은 주황빛이었으니까. 밥상 한켠을 동그마니 지키던 허여멀건 한 김치는 언제나 가족의 관심 밖이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성인이 된 지금도 밥을 먹을 때 김치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없어도 상관없고 있으면 좋은, 딱 그 정도랄까. 


 하지만 식당 밑반찬으로 나오는 새빨간 김치를 볼 때면, 왜인지 엄마가 만든 주황색 김치가 떠오른다. 한때 김치란 원래 그런 줄 알았던, 싱겁디싱거운 엄마표 김치. 나의 이성은 엄마를 밀어냈지만 미각은 모순적이게도 아직 엄마를 찾는가 보다. 


 몇 년 전까지, 아니 얼마 전까지도 가족의 인연도 끊을 수 있는 범주에 들어간다고 확신했다. 남보다 못한 가족은 남보다 못하게 취급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해왔다. 하지만 현실은 몇 장의 글보다 훨씬 복잡한 법이다. 연락은 쉽게 끊을 수 있으나 기억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식구’였으니까. 동그란 밥상에 머리를 맞대고 몇십 년간 한 냄비의 찌개를 나눠 먹던 사이였으니까. 


 그래서 가끔 엄마 생각이 난다. 식사는 잘 챙기시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이런저런 문제는 해결됐는지 등등. 흔한 모녀 사이처럼 시시콜콜한 것들이 궁금하다. 하지만 아직 통화버튼을 누를 만큼 궁금함이 차진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할 뿐. -안다, 비겁한 변명이라는 거-


 이제는 내가 그 시절의 엄마처럼 식구들이 나눠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아침 일곱 시, 오후 네 시가 되면 ‘오늘은 뭐 먹지’하는 고민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점점 자라는 딸의 입맛이 까다로워지는 탓에 그 기준을 맞추는 일조차 쉽지 않다. 세 번 연속 먹으면 안 되고, 맵고 짜지 않아야 하며, 일주일 반경 이내에 나왔던 적 없는 새로운 반찬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보면 결론은 비교적 안전하고 쉬운 카레며, 김이며, 밀키트 같은 치트키로 향한다. 


 엄마의 위치에 서게 되자 이기적이게도 엄마를 위한 변명이 하나둘 생겨난다. 나도 서툴고, 힘들었다고. 나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고. 어쩌면,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딸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저녁은 뭘할지 고민하고, 다듬고, 요리하는 과정 내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걸 나눠 먹을 식구들 생각뿐이라는 걸, 엄마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겠다고 딸의 자리를 박차고 나간 나는 돌고 돌아 엄마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내가 낳은 아이들을, 내가 만든 음식을 먹여 키우면서도, 도망쳐 나온 이전 ‘식구’의 동그란 밥상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오늘 저녁엔 엄마는 뭘 드셨을까. 맛이 심심하지만 주황빛이 선명했던 그 김치가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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