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 헤어 모델을 체험했습니다. 산발이 된 머리를 다듬을 겸, 디자이너 승급심사를 위한 커트 모델에 지원했죠. 어색한 정장을 걸친 이십 대 초중반의 아이들이 미용 도구가 가득한 캐리어를 끌고 시험장으로 하나 둘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잔뜩 긴장하면서도 재잘거리는 모습이 풋풋해 보였습니다. 타이머를 켜고, 잔잔한 배경 음악만이 깔린 적막 속에서 가위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왜인지 비슷한 시절을 보낸 제가 떠올랐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 입학 전까지 한시적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지루하게 흘러가던 나날 중, 집 가까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에 주유소 아르바이트는 소위 ‘노는 애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습니다. 주변의 영향으로 소심한 성격도 대범해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모험이었죠. 아뿔싸, 도착한 사무실에는 사장님, 실장님, 점장님. 이렇게 아저씨 세 분만 주르륵 앉아 계셨습니다.
어쨌든 일을 시작했습니다. 손님이 오면 인사하고, 주유한 후 결제까지의 반복. 첫 아르바이트였으나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손님이 없을 때는 밖에 앉아 봄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봤습니다-스마트폰도, 미세먼지도 없는 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당시 덕이동이 개발 전이라 맞은편엔 높은 건물도 없는 사거리 코너의 주유소는 하늘 풍경이 끝내줬습니다. 연배가 비슷한 점장님과 실장님이 어쩌다 하늘 아래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품평을 할 때면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미야, 너 이건 알아야 해. 남자는 다 변태야. 드러내 놓고 변태, 아닌 척하는 변태. 근데 후자가 더 위험하다?”라는 실소를 자아내는 인생 교훈도 설파해주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벤츠가 들어왔습니다. “가득”이라는 짧은 한마디에 주유건을 꽂고 파란 하늘을 감상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날따라 날씨는 왜 이리 좋던지 휘발유에 바지가 젖은 걸 뒤늦게 눈치채고야 말았습니다. 주유건의 센서가 고장 나 기름이 역류할 만큼 찼는데도 자동으로 멈추지 못한 거죠. 주유소 바닥엔 휘발유 강이 생겼고, 차주의 항의로 주유비도 못 받고 사과를 해야 했지만, 사장님은 크게 면박을 주거나 알바비를 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마 아르바이트가 처음이었던 열아홉 여자아이를 배려해주셔서겠지요. 제게는 뜻밖의 사건이었습니다. 모네가 그린 듯한 그 날의 하늘과 허허 웃어 넘기시던 사장님의 모습이 한참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Claude Monet, Woman with a Parasol - Madame Monet and Her Son, 1875 / 위키디피아
땅 부자 할아버지와 자유로운 영혼의 아버지 사이에서 번듯한 집에 살며 생활은 가난한 혼란스러운 십 대와 이십 대를 보냈습니다. 그즈음 이혼하신 어머니와 남동생을 떼어놓고 이사 온 일산 집은 둘이 살기에는 크게 느껴졌습니다. 일련의 사건들로 저는 사춘기와 더불어 찾아온 불행에 찌들어있는 중이었습니다. 못 견딜 만큼은 아니었으나 행복은 구름처럼 멀던 그때. 그 기간 한가운데 있던 주유소의 기억이 행복으로 남은 건, 사소한 농담과 배려가 어둠 속 작은 불빛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기억은 유쾌함이라는 씨앗을 마음속에 남겨, 꿋꿋하게 싹을 틔웠습니다. 저도 누군가의 행복한 기억 끄트머리에 남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한 시간 반이 지나 테스트가 끝났습니다. 커트 전 본 사진은 오연서였는데 거울 건너편에는 최양락이 떨떠름한 얼굴로 앉아있네요. 제 얼굴이 문제인 것인지, 스타일이 문제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냐는 질문에 예쁘다고 대답했습니다. 귀 뒤로 넘기면 나름 김나영 스타일까지는 돼 보였거든요. 일주일 뒤 약속 잡은 펌까지 하면 더 나아지겠죠. 커트를 마치고 나온 하늘은 오래간만에 미세먼지 없이 맑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