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e May 29. 2019

2019년 5월 4일 토요일 맑음

아버지.

2019년 5월 4일 토요일 맑음


나는 우선매수권을 가졌으니 공매로 나온 포천 집 오른편을 꼭 사야 한다고 설명했다. 과거 집과 앞쪽 강 사이, 집을 지을 수 없는 땅이 평당 70만 원에 매물로 나온 적 있다. 이번에 나온 땅은 평당 35만 원이고 건축까지 가능하니, 지저분한 것을 잘 정리하면 평당 100만 원 까지 올라갈 것이다. 정권이 바뀌어 북한과 사이 틀어지면 폭락할 땅이라는 딸의 말은 뭘 모르는 소리다. 이 땅은 의심할 것도 없이 폭등할 땅이다.-애초에 창구로 직접 신청 가능했다면 딸에게 상의 없이 진행할 텐데. 인터넷 사용법을 모르는 나는 번거로워도 딸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하면 전처사이 빚도 청산할 수 있다. 하지만 대화 내내 딸은 마뜩찮은 표정을 짓는다.


오래간만에 가족 앨범을 들춰보았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다. 딸과 웃는 사진이 가득하다. 어릴 땐 얘도 또랑또랑하니 귀여웠는데. “아빠~!”라 외치며 품에 안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십년전, 와이프와 갈라진 후로 딸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때 사춘기가 시작되었는지 말조차 붙이기 어려웠다.


앨범과 책들을 그러모아 가져가라 건넸다. 일산집도 언제 정리할지 모르는데, 이제 시집갔으니 제 짐은 제가 가져가야지. 몇 개는 챙기고 몇 개는 그냥 버리라 이야기하는 딸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 쟤는 항상 불만이 많은 표정을 짓는다. 제 엄마를 닮은 것인지... 애초에 다정한 부녀 사이도 아니라 큰 기대는 없다. 아장아장 걸어와 “할아버지~!”를 외치는 손녀만 자주 보고 싶을 뿐이다.


손주들 한약과 직접 키운 단호박즙을 건넨다. 딸은 집이 좁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내 집도 좁다 이것아, 성의를 봐서라도 좀 웃으면서 가져가라.'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고 싶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 참아야한다.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도 많은데, 기대 안 하겠지. 딸네 가족은 언제나 그렇듯 잠깐 머무를 뿐이다. 저녁까지 먹고가지... 장난꾸러기 손녀 덕분에 시끌벅적하던 집이 한순간 적막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자유를 위한 조그만 희생일 뿐. 정 외로우면 최근에 사귀기 시작한 여자와 통화하거나, 이웃 펜션에 놀러 가 술 한잔 하면 그만이다.


쌓인 카세트테이프 중 하나를 꽂아 음악을 들으며 내일 할 일을 정리한다. 모종 심고, 밭 고르고, 더운 날에도 할 일이 태산이다. 한 달 전, 정기적으로 초등학교에 물건을 대는 일을 해보자고 김씨가 제안했지만 시간에 쫓기는 일은 딱 질색이어서 거절했다. 농사도 있는데 거기 매달릴 순 없지. 그 돈 받고 고생할 생각은 없다. 부족한 생활비는 담보 대출로 보태고 있으니 급할 건 없다.     




그는 내 아버지, 넓은 포천 집과 일산 집을 홀로 지키는 이, 자신만을 부양하며 자유로운 삶을 즐기는 분이다.-그런 분이 기적적으로 날 대학까지 보내셨다- 기억이 안 나던 시절엔 그를 좋아했고, 기억이 나던 시절엔 그를 싫어했고, 지금은 내 아이들이 좋아하는 할아버지이다. 본인을 닮았다는 말이 악담이 되는 사람. 슬프게도 주변의 그런 평판을 알면서 모른척해야 하는 사람.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건, A4 한 장도 안되는 앞의 서술이 전부이다.




Background image (c) by Sasin Tipchai from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관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