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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Sep 06. 2022

기막힌 결혼기념일

8월 25일은 결혼기념일이다.

휴가를 겸해 그전 주 토요일에 맞춰 워터파크가 딸린 호텔을 예약해놨고,

우리 가족 네 명은 부푼 기대를 안고 하얀 승용차에 짐을 가득 실어 그곳으로 떠났다. 

그게 악몽의 시작일 줄은 몰랐다.


워터파크는 환상적이었다.

아이들은 머리 털나고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손발이 쪼글쪼글해지도록 유수풀을 빙빙 돌기도 하고,

거의 90도까지 꺾이는 4인용 튜브가 너무 재미있다며 그 긴 줄을 두 번이나 기다리기도 했다.

파도에 휩쓸리는 바람에 무릎이 까져 피가 철철 나면서도 한번 더 올 궁리를 했다.


밤에는 호텔 내에 조명으로 꾸며진 길을 산책하고,

아침에는 산 위의 양 떼 목장에 가서 동물들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맛집도 가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모든 게 잘 마무리된 줄만 알았다.

그런데 끝난 게 아니었다.


첫 번째는 남편이었다. 

화요일부터 목이 아프다고 서재에 틀어박혀 자가 키트를 했다. 결과는 두 줄.

PCR 검사 후 격리에 들어갔고 나는 일주일 동안 일회용 그릇에 남편의 식사를 챙겨 들여보냈다.

그렇게 25일이 지났고 격리가 끝나면 맛있는 걸 먹자 톡을 나누며,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다.

나의 착각이었다.


남편이 격리 해제되는 월요일 무렵, 첫째가 기침을 하더니 토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뿔싸, 열이 있었다. 역시 자가진단 키트는 약한 두줄을 보였다.

PCR 받기 전부터 양성이라는 확신이 왔다.

이제는 양성과 음성이 2:2. 따로 지낼 숙소를 알아봐야 했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지레 남편에게 옮았다는 가정을 하고, 왜 제대로 격리하지 않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어쨌든 걸리지 않은 둘째와 나는 도망치듯 호텔로 나와 일주일 숙박을 잡았다.

-이 와중에 회사에서는 급한건으로 계속 전화와 문자가 왔다.-

'일주일만 버티면 돼, 일주일만!'

나와 둘째는 두 번째 밀접접촉자 PCR 검사를 받았다.

-자가진단에 신속항원까지 하면 이때까지만 네다섯 번 코를 쑤신 것 같다-

이번엔 내가 확진이었다.


둘째를 살려야 했다.

격리 해제된 남편과 격리가 시작된 나만 숙소를 교체했다.

남편은 호텔에서 둘째를 등 하원 시켰고,

나는 결혼기념일 따위 잊고 집으로 들어가 앓아누웠다.

고열-콧물-인후통-설사, 증상이 하루씩 번갈아가며 사람의 혼을 빼놓았다.

같이 격리되어 방치된 첫째는 심심하다며 매시간 매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호텔에서 숙식하는 남편과 둘째에게 우산은 있을지언정 여분의 신발이나 장화를 기대하긴 무리였다.

매일 밤 젖은 운동화를 말렸고, 아마 냄새도 조금 났을 것이다.

정말 최악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이번엔 태풍이 온단다.

매일매일 상황이 최악을 갱신했다.

도대체 '격리 끝나면 맛있는 거 먹는' 날이 오긴 올는지, 

지긋지긋한 비를 보며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격리 마지막 날을 보냈다.


등교시간을 착각해 이른 아침에 밥도 먹지 못하고 아이는 학교에 뛰어갔다.

물통마저 챙기지 못해 나는 다시 교실로 찾아가야 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이웃 할머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그동안 왜 보이지 않았냐는 질문이 나왔다.

"실은......"


걱정하던 태풍은 오지 않았다. 비구름 때문에 우중충하던 날이 개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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