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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rtensia Aug 02. 2018

레오폴드: 빈의 화가, 클림트 -2-

화려해 보이는 이들이 지닌 비밀의 방

There is nothing special to see about me. 

I am a painter who paints day after day, from morning to night. 


- Gustav Klimt, 1862-1918


처음 암스테르담에 머물렀을 때 일이다. 이른 아침 거리로 나가 바라본 하늘은 구름이 비끼어 흐릿한 듯 푸르렀다. 빼곡히 늘어선 건물은 탁한 모랫빛이었다. 운하를 따라 흐르는 짙은 녹색 물에 윤슬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때 알았다. 내가 딛고 선 땅에 뿌리내려 자라는 색이 곧 렘브란트, 베르메르, 반 고엔의 색이야. 화가가 나고 자란 대지, 몸담고 지낸 문화, 같은 공간에서 어울리던 사람들이 그대로 작품에 배어나고 드러나. 화가와 화가를 배출한 장소는 불가분의 관계야. 


레오폴드 미술관에서는 6월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가, 마찬가지로 11월 4일까지 에곤 쉴레 100주년 기념 주빌리 쇼가 열리고 있었다. 두 화가는 빈에서 나고 활동하며 서로 교류했다. 클림트는 쉴레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다. 쉴레는 클림트가 이끄는 빈 분리파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클림트가 28년 먼저 태어났지만 둘 다 1918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나마 가장 나쁜 시절을 목도하지 않아도 되었다, 면 과한 말일까.


개인적 호오만 따지면 클림트는 풍경화만을 선호할 뿐더러 쉴레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때로 알고자 하는 욕망이 좋고 싫은 기분을 넘어선다. 한 도시의 화가를 그 도시의 미술관에서 보고 싶다. 어떻게 다뤄지고 그려지는지 알고 싶다. 알게 되면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클림트와 쉴레 전시 외에도 마담 도라 및 하이디 호텐의 "WOW!" 전시가 함께 열리고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타자를 향한 시선


빈에서 그의 작품을 접하는 건 각별하다. 클림트는 빈 부르크시어터의 두 계단 장식을 맡아 성공적인 결과를 내며 스물 여섯에 찬란한 커리어를 시작했고, 서른다섯에는 빈에서 활동하던 다른 예술가들과 뜻을 모아 빈 분리파(Secession)를 이끌었으며, 세계1차대전이 끝나기 아홉 달 전 폐렴으로 빈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쉰다섯이었다. 


클림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소질을 보여 정규교육을 밟아온 케이스였다. 열여섯에 비엔나 응용예술학교를 졸업하고 1883년까지 장학금을 받으며 회화 대학을 다닌다. 졸업 직후 커리어는 장식예술가로서 시작했으나, 서른 무렵에 그린 여인의 초상화를 보면 이미 화가로서 무르익은 기량을 느낄 수 있다. 


여인의 초상화, 1893. 벨베데레 미술관 소장.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당대 유명 제과장이었던 요한 브로이히의 아내로, 플뢰게 자매가 운영했던 패션 살롱에서 포즈를 잡고 있다. 흐릿한 듯 가볍게 묘사한 얼굴의 윤곽, 쇄골에 떨어지는 빛과 그늘, 흰 배경에 두드러지는 벨벳 드레스의 대담한 검정색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클림트 특유의 번질 듯 부드러운 피부 묘사를 어렴풋하게나마 찾을 수 있다.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다수가 유한계급으로, 그 헤어스타일에서부터 복식에 이르기까지 당시 빈에 유행하던 스타일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클림트의 처제이자 유명한 의상디자이너였던 에밀리 플뢰게의 흑백사진에, 뉴욕 노이에 미술관에 걸려 있던 아델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가 겹쳐 보였다. 영원처럼 남겨진 저 색, 빛, 표정 저편에 피와 살을 지닌 채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거리를 거닐던 인간이 존재했다, 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나도 당신도 지금으로부터 백 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우리가 그러하다. 


웃는 여인의 정면 초상화, 1899,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


클림트는 사람을 그렸고 사회와 부대꼈다. 당시 온갖 논란과 비난을 불러일으켰던 세 점의 빈 대학부 회화(Faculty painting for the University of Vienna)이 한눈에 들어왔다. 철학이 풀고자 하는 세계의 비의, 의학이 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생명, 그리고 법학이 지키고자 하는 세상의 정의를 클림트 자신의 방식대로 묘사한 작품이다. 

 

빈 대학부 회화. 왼편으로부터 순서대로 철학, 의학, 법학. 1900-1907. 1945년 이멘도르프 성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된 탓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철학> 오른편, 불분명한 신비에 감싸여 반쯤 눈을 감은 얼굴은 스핑크스를 연상케 한다. 그 왼편, 어리고 젊은 육체를 뒤틀며 실존 앞에 고뇌하는 인간의 무리가 보인다. <의학>의 한가운데 서 있는 여성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딸이자 건강을 주관하는 히기에이아로, 나이듦과 죽음을 등지고 선 그 옷자락은 생명력으로 붉게 빛난다. <법학>에서, 벌거벗은 죄는 양심의 여덟 촉수에 단단히 붙들려 심판을 기다린다. 복수를 주관하는 세 여신의 머리타래에 휘감긴 금빛 뱀이 도드라진다. 유서깊은 세 학문이 인류 지성사에서 누려온 권위, 영광, 위엄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 측에서는 심하게 반발했고 그림은 걸리지 못했으며 클림트는 격분했다. 


개인이 사회와 관계맺는 방식으로서, 논란의 중심에 서는 일은 업적을 남기는 일 못지않게 강력하다. 비난과 질투는 찬사와 칭송의 배다른 여동생이다. 마키아벨리의 친구이자 성공적인 외교가로 살았던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세상을 위해 한 일로써 여겨지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누리는 최대의 행복"이라 했으나 또한,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평범한 이들, 죽음조차 그들을 잊고 찾아오지 않는다"라 말하지 않았던가. 


클림트는 고독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당대의 빈과 적극적이고 깊이있게 관계를 맺어나갔다. 


자화상은 그리지 않습니다, 흥미가 없거든요 


흔히 클림트의 작품이라 하면 그가 그린 여성들부터 떠올리지만, 풍경화 역시 그가 주력한 분야로서 상당수 작품이 남아 있다. 클림트가 다루는 여러 주제 중 가장 좋아하지만 전시회가 열리면 한두 점밖에 건너오지 않아 늘 아쉬웠다.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내걸린 스케치에는 눈길을 더 주지 않고 방을 가로질렀다. 다만 그의 녹색을 원했다.


들어서자마자 이 작품이 눈에 안겨들었다. 


아테르제 호수에서 (On Lake Attersee), 1900,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

점점이 녹색으로 일렁이는 잿빛 호면, 세상 모든 정적의 목소리로 발견되지 않은 평안을 약속하는 듯한 저 색. 마음이 아리다. 물 냄새가 난다. 새볔녁 소리가 목 뒤 솜털마저 바짝 세울 듯하다.   


수면에 간간이 빛이 도는 듯한 느낌은 왼편 하단 진주빛 붓터치 덕분이다.  


연못가의 아침(A morning by the pond), 1899,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클림트의 첫번째 인스타그램, 은 아니고 정사각형 구도로 그려진 최초의 풍경화다. 플뢰게 가족과 떠난 여름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그려졌다고 한다. 이 <연못가의 아침> 역시 과감하게 수면을 전면에 내세웠으며, <아테르제 호수에서>는 그 구도 때문에 빈 분리파의 첫 전시에서 심한 혹평을 당했다고 한다. 수면 위 아롱지는 엷은 분홍빛 구름과 아스라하게 번져드는 연둣빛 연안이 아련하다. 한 톤 누른 듯 차분하고 부드러운 색조는 이후 클림트 묘사의 핵심이 된다. 


쇤브룬 풍경(Schönbrunn Landscape), 1916, 레오폴드 미술관 영구임대

말수 적은 녹색이 클림트의 풍경화를 지배한다. 사시나무 끝가지에 나부끼는 흑청색, 너도밤나무 새순의 투명한 연두색, 솔송나무의 차분한 회록색, 호면에 되비치는 유록색, 빽빽하거나 촘촘하거나 웅크리거나 울타리진 녹색은 전면에 가득하며 수면에 가득하다. 인적은 드물거나 찾기 어렵다. 이 <쇤브룬 풍경>에서는 멀리 보이는 검정 및 분홍빛 자취가 언뜻 어른과 아이를 연상케 할 뿐이다. 재미있게도 이 작품이 빈의 풍경을 묘사하기로는 유일하다.

   

릿츨베르크켈러(Litzlbergkeller), 1915/16, 개인소장

호수 위에서 그렸다고 여겨지는 이 작품은 오토 프리마베시가 의뢰하여 그려졌다. 이 그림에서도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오직 고요하게 피어난 덤불과 둔덕과 나무들뿐이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다각도로 긴밀한 관계를 주고받으며 평생을 보낸 클림트인데, 그의 풍경화에서만큼은 인간의 모습이 철저하게 배제돼 있다. 그는 바깥을 향해, 심지어 여러 스캔들마저 감내하며, 늘 열려 있었으나 정작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한때 말했다. "자화상 같은 건 그리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그림의 주제로 다루는 데는 흥미가 없습니다. 나는 타인에게, 특히 여자에게, 그러나 그 무엇보다 세상의 여러 현상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 스스로도 딱히 재미있는 사람은 아닐 겁니다. 특별할 것도 없고요. 나는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그림을 그려낼 뿐입니다. 


그러니, 나를 알려면 내 그림을 보면 됩니다."


이 말이 사무친다. 겉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이들이 지닌 비밀의 방에 대해 생각한다. 밖에서 거침없이 사교적일수록 홀로 있는 시간은 내밀하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걸어잠근 채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을 순간이 필요하다. 마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비껴 떨어지는 외계의 인상(印象)과 그 반향을 오롯이 갈무리하는 시공간은 창조적인 작업에 그 무엇보다 종요롭다. 


클림트가 쫓았던 빛은 사람과 사람들, 현상의 한가운데를 비췄다. 녹색의 침묵에서 그 그림자를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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