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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유영 Feb 04. 2023

가죽 공을 처음 손에 쥐었던 날의 기억

농구가 내 삶에 들어온 과정(1)

지난 설날, 조카 1호가 농구를 알려달라고 했다. 내가 갓 30대에 들어설 무렵, 나와 함께 농구를 했던 처남이 ‘고모부(나)가 농구를 잘한다’고 알려준 모양이다. 조카 1호는 농구공도 가져왔다고 신나게 말하며, 무술을 배우는 사람처럼 ‘사부로 모시겠습니다’고 말했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놀랐다. 며칠 전, 함께 관람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영향이 지금까지 남은 것 같다고 처남이 살짝 말해 줬는데, 그 말이 진짜였나 보다. 


우리는 동네 농구 코드에서 함께 공을 튀기며 즐겁게 놀았다. 고등학생 정도가 적당히 뛸 높이라 조카 1호에는 골대가 너무 높아서 ‘역시 아이에게 맞는 높이가 중요하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예전만큼 슛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하며 좌절했다. 그래도 처남과 조카 2명과 신나게 농구를 흉내 냈다. 술래잡기하듯 계속 뛰기만 했지만,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았다. 


농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30대 초반에 농구를 하다 발목 인대가 끊어진 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후로 농구를 15년 정도 쉰 셈이다. 다치고 5년 후에는 농구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20대 때처럼 뛰지 못하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움직임이 굳어서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거기다 내 뛰는 모습은 엉망이었다. 아쉽게도 4개월 활동 후, 탈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게임을 마치고 샤워하면서 무척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마치 삶이 무너진 사람처럼 엉엉 소리까지 내며 눈물을 쏟았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농구와 함께한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농구를 빼놓고 내 10대부터 30대를 이야기하기 힘들다. 처음 농구를 만나면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자아가 꿈틀댔고, 별 볼 일 없던 시절은 농구 덕에 밝게 빛났다. 40대를 맞은 지금도 난 여전히 농구를 하면서 지낸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아내가 ‘play basketball’을 허락해 준 덕분이다. (그리고 글로도 정리해 보라고 격려했다. 물론 격려라고 쓰고 강제라고 읽지만 말이다.) 


 내 농구 역사를 돌이켜 보며 글을 쓰고 싶은데, 기억할만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진도 한 장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로지 내 기억에 의지해야 한다니, 이런 일이 흔치 않아 좀 당황스럽긴 했다. 그래도 아내에게 오랫동안 이야기한 내용이 있어서 기억을 더듬으며 쓰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처음 농구공을 두 손으로 잡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다. 농구에 빠졌던 그날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나는 중3 때까지 키가 작았다. 반 60명 중 키 번호로 5번이었다. (애국 조회라는 걸 하던 시기라 운동장에 전교생이 키순으로 서던 시기라 키 번호가 있었다.) 그런데 졸업할 때가 되니 내 키가 갑자기 자랐다. 중3이 시작하던 시기에는 157cm였는데, 갑자기 170cm 언저리까지 컸다. 번호는 여전히 5번이었지만, 조회 시간에는 상당히 뒤편에 섰다. 졸업식 때는 거의 제일 뒤편에 서 있었다.


급하게 큰 키라 몸이 둔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공부도 맹하니, 동갑내기 사이에서 바보 취급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키만 조금 크기만 한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같이 놀던 친한 아이들은 모두 키가 작았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키가 작아 슬픈 일을 많이 당했다. 같은 반에 키가 큰 아이가 놀리는 일이 잦았고, 난 그런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던 때, 키가 자란 사실에 감사했다. 


고등학교를 친구 한 명 없는 곳으로 진학했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1995년에는 ‘왕따’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같은 학년 900여 명 사이에 혼자 버려진 느낌으로 지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지역으로 이사한 부모님을 원망하는 날이 잦았고, 혼자 지내는 날이 길어져만 갔다. 


학기 중간 정도에, ‘이범준’이라는 아이와 만났다. 다른 게 아니라, 그 친구와 집이 같은 방향이었다. 그때는 단지 집이 같은 방향이라고 친구를 할 수 있었다. 서서히 친해진 우리는 함께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시시콜콜한 대화였던 것 같다. 범준이 엄마의 요리가 맛이 없다는 내용부터 여자를 사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를 맞대며 열띤 논의도 나눴다. 우리는 그 시기 고민을 함께 고민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농구도 범준이 덕분에 알게 됐다. 범준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일이다. 그는 내 키가 크니 농구를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고1에 접어들었을 때 177cm까지 자라 있었다.) 나는 난생처음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를 분야를 발견한 것이다. 범준이는 농구를 알려주겠다며, 집에 있는 고무공을 튀기며 나갔다. 그때는 부모님이 사준 농구공 모양을 한 고무공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고무공으로 재미있게 놀았다. 

범준이가 가르쳐준 첫 번째는 골밑슛이었다. 내 키가 크니 적절히 익히면 시합에서도 도움이 된다고 말해 주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급하게 키가 크다 보니 내 몸은 둔했다. 농구가 어색하고 어렵게 느껴져야 당연했다. 그런데 그와 2시간 정도 농구를 하고 나서부터 세상이 달라 보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가 무언가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공부는 뒤로한 채, 매일 나가서 농구장에서 지냈다. 


그러다 내 고무공이 다른 아이들이 던지는 공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들이 던지는 공은 어딘가 달랐다. 공이 고무가 아닌 가죽으로 싸여 있었다. 그제야 난 공이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날 저녁, 엄마에게 가죽 농구공을 사달라고 졸랐다.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나도 나만의 물건으로 보상해 달라고 떼를 썼다. 마지못해 엄마는 내 인생 첫 농구공을 선물했다. 그리고 공을 양손으로 잡고, 달려가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가죽 공을 쥔 날 나는 유명 농구 선수라도 된 양 신나 어쩔 줄 몰랐다. (그 뒤, 신발장을 가죽 농구공으로 한가득 채우는 애호가가 됐다.)


공을 받고 뛰어나가 슛을 던지고 싶었다. 드리블도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을 받은 날 저녁은 다른 날처럼 어두웠다. 저녁에 불을 켜지 않는 농구 코트를 처음 원망했다. 내일은 어서 학교가 끝나길 난생처음 바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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