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호르몬은 거꾸로 흐른다
찹찹찹, 짝짝짝.
방금 막 씻고 나온 온몸에 바디로션이 흥건한 나체(로션 흡수를 위해)로 서서 그가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는 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채운다. 토너로 얼굴을 닦아내고 에센스- 로션-크림 순서로 피부결을 정리한다. 촉촉한 머릿결에 이미 헤어 에센스는 발랐다. 한껏 광이 나는 얼굴로 홈케어 디바이스를 집어 들어 인텐시브 모드를 작동시킨 뒤 얼굴 전면에 광선을 쪼인다. 각 부위별로 10샷을 받아 들며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그는 철인 3종 경기 운동을 취미로 십 년 넘게 이어오는 마흔 중반의 중년 남성이다.
격한 운동을 하니까 최소한의 관리는 해줘야 한다는 그의 말이 이해는 가지만 흔치 않은 풍경에 가끔씩 놀라움이 겹친다. 언제부턴가 내 화장품을 같이 쓰기 시작했고 나보다 더 자주 미용실에 가서 펌을 하며 주기적으로 마스크 팩을 하는 관리하는 남자. 꽃중년이자 초식남의 시작이 모호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그의 중년 남자 관리 라이프에 나는 가끔씩 번쩍 정신이 든다.
저 남자도 저렇게 신경을 쓰는데, 나도 관리해야지. 원래도 동안상의 그에게 4살 차이의 공백이라는 마지노선까지 따라잡히기는 싫다. 바르기 귀찮은 화장품을 하나라도 더 바르고, 하기 싫은 머릿결도 신경 쓰며, 숙제하듯 홈케어 디바이스를 해치운다. 그럼에도 귀찮아 죽겠다. 언제부턴가 겉치레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나는 화장품은 간결하게, 머리는 짧게, 바디 로션은 스킵하며 점차 건조한 듯한 외모가 편해져 간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던 외모 치장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든다. 꾸밈이라는 영역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즈음 동적인 운동에 관심이 갔다. 원래 하던 요가와 걷기 외에 러닝과 홈트를 곁들였다. 십 년이 넘도록 그가 달리고 운동하는 건 지켜보았지만, 내가 직접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라톤을 뛰고 무거운 덤벨을 들어 올리는 일은 어쩐지 그의 영역 같았다. 지금처럼 걷기를 즐기고 요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쭉 살아가도 내 기준에서의 건강함은 유지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외모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르는 것처럼, 나도 어떠한 이유로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홈트로 덤벨을 하며 쾌감을 느끼고, 매주 2-3회는 30분 이상을 자발적으로 달린다. 그러니까 아무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전혀 나답지 않은 동적인 운동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몸무게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일에 민감했던 나에게 이제 더 이상 체중계의 숫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졌다. 대신 덤벨 중량 숫자나 얼마나 더 오래 달렸는지의 거리수가 훨씬 흥미롭다.
화장품이 듬뿍 올라간 번들거리는 얼굴의 그가 이제 막 헬스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온 나에게 말한다. "이야, 덩치 봐라" 똑같은 말을 십 년 전에도 했을 그였지만, 이제는 놀림처럼 들리지 않는다. 한껏 관리 중인 그에게 들뜨게 말했다. 오늘은 러닝머신 속도를 조금 더 늘리고 끝까지 달렸노라고. 아직도 러닝 애송이지만,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내가 기쁘다. 늘 그 앞에서는 화장한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던 나였는데, 이제는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곱게 늙고 싶다는 그와, 멋지게 늙고 싶다는 나. 남성과 여성의 경계 너머 중성의 무엇이 되어가는 우리. 닮은 듯 닮지 않고 교차하는 시간 속, 그는 더 곱게 나는 더 멋지게 늙어갈 나날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