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로버트 프랭크 <THE AMERICANS>
사진을 열정적으로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1~2주에 한 번쯤, 책을 파는 보따리장수가 학교에 들렀습니다. 그는 좌판을 펼쳐놓고, 학생들에게 사진집과 예술책을 팔았습니다.
사진이나 예술에 관련된 책이 부족했던 때라 나는 단골이 되었고, 아저씨가 올 때마다 책을 샀습니다.
할부로도 샀고 현금을 주고 사기도 했는데, 그 시절의 할부는 어쩌면 인간적 믿음이 바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할부 값을 다 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때 산 책 중의 한 권이 로버트 프랭크의 <THE AMERICANS>입니다. 아마도 8~90년대에, 사진을 공부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이 책은 사진의 영원한 교본으로 통했고, 로버트 프랭크를 사진의 삼촌쯤으로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방학을 하면 필름 50 롤 소모하기 내기를 하며 로버트 프랭크 따라 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50 롤이면 36컷 기준, 약 1,800컷 정도로 적은 양은 아니었습니다.
로버트 프랭크 하면, 우리 국내 작가 중에 두 사람이 떠오릅니다. 이정진과 이갑철 작가입니다. 이정진은 로버트 프랭크의 마지막 제자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갑철은 로버트 프랭크를 가장 잘 따라한 작가입니다. 두 사람 모두, 로버트 프랭크를 통해 자기만의 사진 세계를 구축하여 성공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사실, 내 기억으로 <THE AMERICANS>를 네다섯 번은 샀습니다. 그런데 단 한 권도 남아있질 않더군요. 누군가가 빌려가거나 그냥 가져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한 권을 샀습니다. 미국서 오는데 2주쯤 걸린 것 같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은 미국에서 출판을 거절당해 프랑스에서 1958년에 첫 출간되었습니다.
이듬해 미국에서 출간됐고, 지금은 미국에서 책을 팔고 있습니다.
<THE AMERICANS>는 1950년대 미국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촬영한 것입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고 경제적으로 꽤나 풍요로웠습니다. 로버트 프랭크는 구겐하임 재단으로부터 기금을 지원받고 약 2년간 미국 전역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는데, 촬영의 의도는 당연히 잘 나가는 미국의 현재를 담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는 고립, 침울, 권태, 절망 등 미국 사회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진을 찍습니다.
세계사진사는 <THE AMERICANS> 사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이전은 “사진은 사진이어야”했습니다. 구도, 초점, 적정 노출 등 사진적 요소가 명확하게 구현되어야 사진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프랭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초점이 안 맞고 흔들리고, 구도가 삐뚤 하고, 노출 부족에 거칠고, 사진의 형식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이후 사진은 이러한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현대사진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됩니다.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이 기존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던 것처럼, 서문을 쓴 잭 캐루악 역시 비트 세대의 주역으로서 기존의 질서를 깨고자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쓴 서문은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계는, 그간 지탱해왔던 질서가 깨어질 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근래의 현대사진은 매우 혼탁하고 어렵습니다. 양적으로는 엄청나게 팽창했지만, 그 반면에 예술로서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사진은 그 가치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로버트 프랭크의 <THE AMERICANS>를 다시 보면서 지금 현재의 사진을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