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 SOOOP Jun 20. 2021

그냥 그것이 말하는 것 - Thing

8. 사진에 관한 사소한 대화

『사물들의 물질적 내밀성은 그 다양한 외관에도 불구하고 아주 특징적인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꿈꾸는 인간은 사물들의 한가운데로, 사물들의 물질 자체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 가스통 바슐라르』


이정진 _ Thing


  어린 날 눈이 몹시 나빠져 모든 사물이 희미하게 보일 때 시력 측정을 하면서 쓰였던 숟가락이 혹시 아닐까. 왼쪽 오른쪽 눈을 번갈아 가리면서 보일락말락 한 숫자를 읽어내던 때, 숟가락은 한쪽 세상을 곧잘 가둬 버리곤 했었지. 글쎄 그것이 아니면, 아마도 그 옛날 둥근 어머니의 두레 밥상에 놓여 있던 숟가락일지도 모를 일이야. 너무도 익숙하게 매일 밥을 떠 먹여주던 그 숟가락, 때로는 형의 숟가락이기도 했고 누나의 숟가락이기도 했던, 돌고 도는 밥상 위의 숟가락에 지금은 시간의 녹이 고여 있네. 밥 대신 시간을 떠서 입 안 가득가득 넣어주고 있네. 생각만 해도 배가 불러와. 우리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가 어느 순간 스멀스멀 기어 나와 그때를 회상하게 해 주는 친근한 사물들은 요상한 마력을 가졌어. 


  그냥 그것인 채, 태어난 제 용도에 맞게 쓰이다가 그만 기력이 떨어질 때면 스스로 기억 창고로 들어가 지친 몸을 눕히는 물건들. 때론 어느 고물장수에게 팔려가 다른 몸으로 둔갑했을지도 모를 일이기도 한데, 낡았지만 제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야. 그래서 잊혀진다거나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언제든 따뜻한 추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지. 사물의 힘은 그런 것이야. 우리에게 그렁저렁한 시간이 흘러 다시 눈 앞에 보일 때이거나 손으로 만져질 때, 훌훌 시간을 털어버리고 내 안으로 쏙 들어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야. 그래 그때 그랬었어. 그냥 그것들은 어렵지 않게 말을 걸어 오지. 지금도 어느 시골 농가 시렁 위의 소쿠리에서 녹을 먹고 있을 놋그릇이며 숟가락이며 젓가락이며…

작가의 이전글 사진책도서관을 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