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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Nov 27. 2023

나무의 계절

반려견과 맞벌이 부부


벌써 12월이 코앞이다. 반려견 나무는 2년 전 12월에 태어났다고 한다. 다음 달이면 견생 3년을 꽉 채운 제법 어엿한 어른 강아지가 된다.




겨울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추위를 덜 탄다는 말은 12월에 태어난 내게 부질없었지만 나무에게는 맞는 말인 것도 같다. 사실은 이중모에 곱슬인 견종 특성상 추위를 덜 타는 것뿐인데.

 겨울은 강아지 산책 하기 어려운 계절이다. 출근 전 아침 산책은 영하의 기온과 싸워야 하는 혹한기 훈련같기 때문이다. 이중모에 곱슬인 강아지에게 영하 1~2도쯤은 거뜬해서 작년에는 영하 4도의 산책에서도 웃는 얼굴로 발랑 발랑 뛰는 모습을 보여줘 '강철여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보호자의 방한 용품만 해가 거듭할수록 업그레이드 중이다.

 

해가 빨리 지는 겨울은 퇴근길 발걸음이 무겁다. 일찍이 산 너머로 가버린 해의 따듯한 기온이 잔존하는 늦은 오후에라도 함께 산책을 하면 좋을 텐데. 6시가 되어야 마치는 업무의 굴레를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해가 거듭할수록, 특히 겨울에 더 골똘해진다. 온종일 고강도의 업무에 찌든 날이라도 겨울에는 저녁밥보다 먼저 산책에 오르는 마음에는 책임감도, 의무감도 있을 테지만 미안함이 가장 크다. 그럼에도 방끗 웃으며 엉덩이를 들썩이며 걷는 아이를 보면서 힘내어 은퇴를 꿈꾼다.




바람 부는 날


 바람이 많이 부는 계절은 강아지와 길을 나서기 지난하다. 여름의 태풍, 가을비가 끝난 초겨울, 장마시즌의 쌩쌩 부는 바람은 강아지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가 보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소리와 땅에 내려앉아 정신사납게 흔들리는 나무의 그림자들, 뜨기 힘든 눈, 휘날리는 리드줄, 나뒹구는 나뭇잎과 어느 잼민이가 버린 듯한 과자 봉지들의 부산스러움 때문이 분명해보인다. 이런 날 나무는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망부석이 된다. 그래 그래, 응가만 하고 들어가자며 달래보아도 한 발자국 떼어볼 여지가 없어 일단 후퇴하기 일쑤다.

 3년 차 반려견 보호자이지만 아직도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산책을 포기하기에도, 나서기에도 난해하다.




여름


 나무의 여름은 유달리 힘겨워보인다. 더위를 못 견뎌하는 나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저 대부분의 개가 그렇듯 열 배출이 힘든 견생일 거다.

 반팔을 꺼내 입는 후덥지근한 날이 시작되면 나무의 털도 짧게 이발을 한다. 이발을 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아침 산책을 거를 수 없는 여름이 도래했음을 몸으로 깨닫는다.

 다른 계절보다 여름의 아침 산책을 거를 수 없는 이유는 명백히 더위 때문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오전 10시부터 푹푹 찌는 더위가 지구를 가득 채우고 땅은 그 열기를 머금어 한참을 들끓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그나마 걸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떨어진 해, 식은 땅, 선선한 바람. 여름의 뙤약볕이 지면을 데우기 전인 이른 아침부터 더위가 한풀 꺾이는 저녁 사이에는 가급적 실외 활동을 피하는 것이 이롭다. 열병이 날 수도 있고 강아지 발바닥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 말 못 하는 강아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여름날의 산책은 텀은 매우 길다. 산책을 사랑하는 강아지들의 지루한 기다림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방법은 아침 산책을 많이, 매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정직한 계절인가.


 우리가 사는 지역은 강과 댐이 있어 평균 습도가 다른 지역보다 높다. 그래서 여름에는 산책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땀이 줄줄 흐른다. 본격적인 산책에 오르면 강아지도, 부부도 30분을 채 걷지 못하고 지치기 일쑤다. 시원한 물병을 챙기는 것을 잊은 날은 아파트 단지 밖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열대야가 한 꺼풀 가신 8월 말부터 나무는 밤 산책 요구로 골을 부리는 날이 잦다. 열어둔 거실창에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먼 산의 푸른 냄새가 연신 궁금한지 졸졸 따라다니며 운동복으로(산책할 때 입는 옷이 따로 있다) 갈아입으라는 듯 코로 종아리를 콩콩 찍어댄다. 근데 나 내일 출근인데, 소극적인 거절 의사를 표현해도 반짝이는 강아지의 눈빛은 깊은 밤에도 반짝이는 행성같아 못본 채 할 수 없다.



비 오는 날


 장마는 눈치 게임의 계절이다. 잠깐의 소강상태일 때를 기민하게 살펴야 한다. 낮잠을 자다가도 비가 멎으면 경보령처럼 "지금이야!"하고 부랴부랴 비에 젖어도 되는 옷을 대충 입고 우산도 없이 뛰쳐나가는 날의 연속이다. 호들갑스럽지만 이런 우리 세 식구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 나무와 살면서 잊지 못할 날을 몇가지 꼽아보라고 한다면 지난 장마 때 철철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자칫 나사 두 어개쯤 풀린 사람들처럼 개와 아파트 단지를 뛰어다녔던 날이 그중 하나일 거다. 이틀째 산책 문턱도 가지 못해 답답해하는 강아지를 위해 부슬비에도 외출을 꺼리는 신랑을 꼬드겨 우중 산책을 즐긴 날.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지만 우리 셋 중 그 누구도 빠짐없이, 빈틈없이 행복했던 날이다.

 

 


2년 전 4월 식목일. 작고 하얀 강아지가 예기치 않게 내 삶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봄비마저 따듯하게 느껴지던 4월에 나무를 만났고 훈훈한 봄기운에 힘입어 나무가 내려앉은 우리의 삶과 땅을 만난 나무의 삶은 무한하게 자라나는 꽃나무처럼 풍성하고 푸른 잎과 향긋한 꽃을 피웠다. 그래서인지 아직 함께한 봄이 2번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 세 가족에게 봄은 뜻깊은 계절이다. 가벼워진 옷차림에 아침이고 낮이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거침없이 차에 시동을 걸어 가까운 곳에 나들이를 떠나고 돗자리를 펴고 누워 하릴없이 시간을 축내면서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아주 먼 미래에 나무가 우리 곁을 아스라이 떠나고 나면 꼭 벚꽃나무를 심자고, 그것을 위해 마당이 있는 집에 이사를 가기로 했다. 만개한 벚꽃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겨울의 황량함을 머금은 산에 울긋불긋 사랑하는 이의 몸에 남몰래 새겨둔 키스마크처럼 핀 진달래와 철쭉꽃이 피어오르는 계절, 나무가 우리에게 와준 그 봄을 기억하자는 부부의 약속이다.





나무의 계절은 비슷한 듯 다르게 흐르며 광활하지만 황폐했던, 웅장했지만 적막했던 부부의 산을 구석구석 채우며 채색을 하고 있다. 한 폭의 그림이 완성이 되는 날 나무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실이 어쨌든지 간에 우리는 함께 세상을 가꾸며 살아간다.


저 작고 하얀 생명체가 불어넣은 온기와 열렬한 사랑만이 남은 두 산봉우리는 오늘도 활기차다. 골짜기마다 흐르는 웃음소리와 장난스러운 6개의 눈빛이 아득한 밤을 가로질러 반짝이니 아담한 은하수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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