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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Feb 23. 2024

둘째가 엄마에게

나는 1남 2녀의 둘째다.


이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둘째로서 어떤 세상을 헤쳐나가며 살았는지 알아주는 이가 점점 줄어드는 요즘이지만 내가 살아온 90년대부터 2000년대에는 여전히 동네 골목 어귀마다 시침 떼고 앉아있는 남아선호사상이 잔존하던 때였다.


말 그대로 위로는 장녀인 언니와 아래로는 4대 독자 장손인 남동생 사이에서 자란 나는 집 안팎으로 늘 열외나 번외 담당이었다. 부모님의 지인이 집에 놀러 올 때도, 친척이 모두 모이는 명절에도 "기특한 장녀"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 장손" 그리고 그다음에서야 "넌 이름이 뭐더라?"가 나의 순서였기 때문에.


3대 독자인 아빠를 낳은 할머니와 함께 산 우리 집에서 4대 독자인 장손, 남동생은 보물 그 자체였다. 그런 남동생 덕분에 나에게는 반찬 하나, 새 장난감 하나 우선권이 주어진 적 없는 순간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집 만년 꼴찌는 나여야만 했다.


천둥벌거숭이, 모지렁이 철부지 아이라 할지언정 그러한 맥락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존재라는 이유로 애꿎게도 매번 “엄마는 나만 미워하지?"라고 빼액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고 어느 날은 엄마 란 듯이 거실에 앉아 이면지에 일부러 눈물 자국 묻히며 써 내려간 가출 일기를 TV에 올려두고 집을 나서는 일도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코찔찔이 꼬맹이는 괜히 동네 순찰 하듯 골목길을 누볐다가, 노인정 옆에 앉았다가, 슈퍼에 들어갔다가 마지막으로 우리 할머니보다 나를 더 어여삐 여겨준 관리실 할아버지 옆에 앉아 머리 한 번 쓰다듬 당하고 달래진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고 음, 이 정도면 엄마도 날 걱정하고 기다리고 있겠지? 라며 의기양양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를 기다린 건 회초리를 든 엄마였다. 종아리가 시뻘겋게 부어 억울해 잠도 못 들던 나이를 훌쩍 지나 생각해 보니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던 그때의 엄마가 얼마나 가여웠는지 그날의 엄마처럼 가슴에 멍이 든 것만 같았다. 후회는 항상 늦다.



결혼과 동시에 시부모님을 모시며 삼남매 중 하나는 등에 업고, 나머지 둘은 양손에 쥐고 사느라 바빴던 엄마에게 둘째의 서러움을 돌봐줄 여유가 가당키나 했을까. 요즘 시대에 와서야 금쪽이니, 상담소니 육아나 훈육에 관한 정보가 많지만 그 시절에는 정말, 가당키나 했을까. 여담을 덧붙이자면 치매에 욕창까지 달고 살던 시모의 장례가 끝난 얼마 뒤에 보육교사가 된 엄마는 매해 우리 생일마다 “얼마나 너희를 무식하게 키웠는지 이제 깨닫는다, 미안하다”며 고해성사를 한다. 그럴 리가. 무식이라는 단어가 가당키나 할까.



대식구의 저녁밥 설거지가 끝나면 엄마는 종종 쓰레기를 버리거나 다음 날 아침식사 재료를 사러 집을 나섰다. 그런 엄마를 따라나서는 것이 엄마에 대한 점유욕을 해소할 수 있었던 유일한 타이밍이던 내게 엄마는 어느 날 여유 없이 살아 너희 셋은 내게 다 아픈 손가락이지만 그래도 네가 제일 아파,라는 서두로 동화같은 이야길 시작했다ㅡ 장손 출산의 강요로 몇 번의 유산을 겪은 후 나를 임신했고 당연히 남자아이일 줄 알았던 내가 (불러온 배의 모양이나 무게가 남달랐다고 했다) 딸이라는 말을 듣고 할머니는 대번에 낳지 말라는 으름장을 또 내놓으셨다고 했다. 시집와서 처음으로 시모에게 대들었던 적이 그때였고 그렇게 날 낳았더니 이제는 피묻은 어린 애를 보육원에 보내겠다는 말에 두 번째로 할머니께 대들어 날 지켜냈다고 했다. 그게 모성애였는지 죄책감이었는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면서.


 그런 이야기를 키만 컸지 10살도 채 되지 않은 내게 마치 동화처럼, 고요한 밤에 얼굴을 가린 채 줄줄 읊던 엄마의 이야기가 끝나도 말이 없던 내게 겨울에 뜨는 별자리 중 가장 밝은 걸 '오리온자리'라고 한다며,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대고 그림을 그려주던 엄마가 여전히 생생히 기억이 난다. 동화 같은 밤이었다.  

 훗날 짐 정리를 하다 우연히 본 내 출생 수첩에 "장영주"라는 가명이 적힌 걸 보기 전까지는 이 모든 이야기가 지어낸 동화인 줄 알았고 나는 그제서야 그것이 엄마의 고해성사이자 스스로 용서받고 싶어 했던 어린 영숙의 발버둥이었음을 깨달았다.


스물 여섯에 나를 낳은 엄마가 더 늙기 전, 언젠가는 말을 해줘야겠다. 살다 보니 둘째가 제일 속 편한 것 같다고. 철이 일찍 들어 부모님 챙기는 것에 도가 튼 첫째 딸과 두 딸보다 살가운 막내아들 덕분에 둘째는 동네 골목이니 뒷산이니 바다 앞으로 천둥벌거숭이 모지렁이처럼 마음 편안시 놀러나 다니며 살고 있으니 염려 말라고. 이런 나의 속절없는 이야기가 엄마가 용서라는 단추를 끼우는 데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 줘야겠다.


사실이 그렇다. 관심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것이 유아, 유년 시절이라지만 시대와 가풍 속에서 이만큼 삼 남매를 올바르고 성실하게 길러낸 것의 8할은 엄마의 몫이라는 것. 그저 이따금씩 위화감 가득한 집안에서 남몰래 안아주던 따듯한 품과 잠든 아들 딸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다정한 손길이야말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 모두 장성해서 제 밥벌이 잘하며, 남 피해 주지 않고 생활고에 허덕이지 않고 평범하게 살게끔 길러낸 것임을.



모쪼록 다행이다. 엄마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남편보다 의지가 되는 첫째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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