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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Mar 30. 2024

이방인의 신혼집 입주기

타지생활기록부

2019년 3월 27일.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경상도 어느 소도시에 살기로 한지 1일 차가 되던 날은 신혼집 첫 입주 날이기도 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느낀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이른 아침 낮게 깔린 안개처럼 가깝기도, 멀게도 느껴진다.



운 좋게 신랑이 살던 지역의 신도시에 신혼집을 구했다. 갓 태어난 동네라 버스 노선이나 슈퍼, 카페나 작은 병원 등의 인프라도 걸음마 단계다. 지역균형 명목으로 대도시에서 내려온 공공기관 재직자들로 평일에는 꽤 붐볐으나 주말은 공동화 현상으로 거리는 한적했다. 이런 곳에서 이방인으로 삶을 시작한 것은 녹록지 않았다. 생활정보도 한정적이었고 볼일을 볼 참이면 구 시가지로 걸음을 옮겨야 했지만, 서울 촌사람에게 지방 소도시의 비효율적인 대중교통 노선은 참을성의 한계를 맛보게 했으며 (가령 이런 식이다, 5km의 거리이지만 동네 사이사이의 전통시장이나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모두 둘러가느라 3~40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경로. 서울에서 맛본 첨단 버스노선과 수많은 배차와 차원이 다르다.) 낯선 곳에서의 혼돈은 피로도가 엄청났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예쁜 카페나 식당이 들어서 요즘은 꽤 시끌벅적한 동네가 되어 신랑과 종종 "그땐 여기 전부 임대공간이었는데, 이젠 웨이팅이 가득하네"라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는 차치하고 다시 이방인 1일 차로 돌아가자면― 새벽 버스는 인천공항에서 하노이까지 도착할 시간만큼 달려 이곳에 날 데려다주었고,  첫발을 디딘 순간만큼은 약간의 설렘과 다부진 포부도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때의 나에게 한마디 남길 수 있다면, "낙천적인 여자 같으니라고"일 것 같다.


이방인 1일 차는 참 바빴다. 아파트 분양 사무소에 들러 전세 잔금, 보증금, 주차등록 등을 해야 했고 입주청소와 소파, 아빠가 사준 TV배송을 맞이하고 중간에 도시가스 설치방문도 대기해야 했다. 이 정신없는 하루를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먼 땅에 정착하기로한 첫날에 말이다. 애석한 사실이지만 신랑을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직장 상사(60세 남성, 미혼)가 그의 '연차 사유'를 도저히 이해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 묶인 발을 제자리에서 동동 구르며 온종일 내게 미안함과 염려를 보내는 신랑을 뒤로하고 씩씩하게 할 일들을 향해 돌진! 했지만 첫 관문부터 난항이다.


입주절차 마무리를 위해 아파트 분양 사무소로 향한 시간이 하필이면 점심휴게시간이란다. 설상가상 귀중품과 전자기기를 눌러 담은 커다란 캐리어와 동행 중이라 동네 산책도 불가했다. 대충 놀이터 그늘에 앉아 시간을 때우다 땀이 주륵 흐를 때쯤 겨우 숙제를 마치고 현관출입카드를 받아 들어 집 앞에 도착하니 3월임에도 땀으로 옷이 다 젖었다. 이렇게 열성을 다해 집 문을 열고나니 보람찬 것도 같지만 서럽기도했다.

 이런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입주청소업체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장장 4시간 정도를 쫓겨나(?) 있어야 했는데 이때 두 번째 난관이 시작된다. 이곳 토박이인 신랑과 달리 이주를 해야 하는 나는 며칠 전 미리 사계절 옷가지, 간단한 생필품을 총 5개의 박스에 우겨 담아 우체국 택배 예약을 해두었는데 예정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입주청소를 하는 동안 짐을 들일 수 없어 복도에 덩그러니 방치해야 했다. 그렇다고 복도에 앉아 청소시간 내도록 짐을 지키고 있을 순 없기에 큰 캐리어만 들고 근처 어딘가로 향해야 했지만 신생 도시에 작은 동네 카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 갈 곳 없는 신세가 타지에서 실려와 복도에 내던져진 박스들 같았다. 기시감을 뒤로 감추고 네이버 지도를 켜 도보 10분 거리의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캐리어를 소란스럽게 끌고(귀중품이니까) 도착해 늦은 점심을 때우며 4시간의 지루함을 달랬다. 아, 지난하구나.



청소종료의 기쁜 소식도 잠시, 크고 작은 가전 가구의 배송과 설치기사님을 맞이하느라 바쁜 오후를 보냈다.  일주일 후의 결혼식 준비를 위해 며칠간 집을 비워야 했고 본식 후엔 바로 신혼여행을 떠나므로 공실기간이 생겨 최소한의 설치를 해야했다. 그러다보니 바빴던 만큼 수확이 없는 듯 보이는 텅 빈 집과 단 둘이 남게 되었다. 적막감. 고요함. 이런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가득했던 오후.


텅 빈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휴대폰 핫스폿에 기대어 대행사를 쓰지 않아 여전히 챙길 것이 남은 결혼식 준비와 신혼여행 준비물, 가구와 가전 배치를 정리하다 보니 인터폰으로 입차 알림이 들려온다. 공동화로 텅 빈 신도시에서 처음 느낀 첨단 기술(?)의 맛. 이제야 신도시 느낌 좀 나네, 하고 터미널 앞에서 사 온 노란 꽃다발과 일찍 돌아가신, 평생 못뵐 시아버지와 성인이 된 신랑을 합성해 만든 작은 사진이 담긴 새 지갑을 들고 현관문 앞에 섰다. 두근두근. 입주 서프라이즈 선물로 이 우울감을 없애리라!


문을 열고 등장한 신랑의 얼굴이 꽤 복잡하다. 하루종일 나에대헌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했을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꼬, 서러웠던 내 신세를 잠시 뒤로하고 꼭 안아주었다. 잘 살아보자고,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한다고 이방인이 원주민을 맞이했다. 주객이 전도된 듯한 첫 재회를 서둘러 마치고 어설프게 정리되어 있는 집을 구경하니 온종일 서로를 침전하게 했던 모든 감정이 씻겨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 집" 이 세 글자가 이토록 뭉클하고 감격스러운 이유는 장거리 연애를 하는 수개월동안 주말이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전국 팔도를 유랑하듯 묵었던 남의 숙소가 아닌 우리 둘만의 공간에서 정착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목요일 밤마다 짐 안 싸도 되고, 일요일 밤마다 헤어지지 않아도 돼. 좋지?" 이 말에 울음이 터질 만큼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곧바로 대형마트로 가 간단한 생필품과 소형 가전을 사서 돌아왔고 이삿날이니 짜장면을 시켜 먹자며 야식 겸 늦은 저녁 끼니를 때웠다. 침대조차 없어 구시가지에 위치한 본가에서 가져온 낡고 좁은 이불을 바닥에 깔고 몸을 부대껴 뉘이니 타지 생활 1일 차인데도 퍽 고단했는지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할 수 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인데 신랑은 이날 새벽잠을 못 잤다고 한다. 새벽 내도록 피곤함에 취해 고롱고롱 코를 골며 자는 내 얼굴을 보며 혼자서 눈물까지 훔쳤단다. 이 어린애를(? 동갑부부이다) 나 좋자고 먼데까지 오게 해서, 이런 꼴(?)로 재우는데도 불만 한 톨 없이 쌔근쌔근한 모습이라니. 요즘도 이때의 이야길 다시금 꺼낼 때면 신랑은 매번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언제쯤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이 가벼워질까, 싶다가도 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문득 가족과 친구들을 마음 낵히는대로 볼 수조차 없는 곳에 사는 날 위해 조금은 오랫동안 묵직했으면 싶은 마음이 변덕을 부린다.


아마 영원히 이방인인 내가 느끼는 공허함과, 원주민으로서 갖는 마음의 짐은 서로를 완벽히 공감하고 이해해 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상반된 하지만 결국 같을 그 마음들이 부대끼며 온기를 뿜어내고 둘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에 쓰일 에너지가 될 뿐.



3월 27일, 이방인으로 살아간 지 5년이 되는 날. 특별하지도 또 아무렇지도 않은 날은 아니지만 그때를 떠올린다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가슴 벅찬 일들이 생생하다는 것만큼은 감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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