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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쿤 Dec 21. 2020

너희가 아닌 우리를 위한 기록 56

D+1286, D+489

정말 오랜만에 글이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결혼 10주년  여행을 다녀왔다. 2주간의 제주도... 그때의 이야기는 따로 써보기도 하고, 아주 오랜만이니 도하랑 로하 이야기를 좀 써봐야지.


2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2주 정도 어린이집에 나가다가 다시 코로나가 심해져서 어린이집에 못 가는 중이다. 그러던 중 친구들은 다들 밥을 혼자 잘 먹는다는 것을 알게 돼서 밥을 혼자 먹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은 갈길이 멀고 한 시간씩 밥을 먹지만 그래도 어머님도 합심해서 도하 입에 밥 안 넣어주고 본인이 손으로 먹는 것을 연습시키고 있다.

2020 - 제주

또 한동안은 짜증 내는 습관이 너무 심해져서 와이프랑 나랑 엄청 고민을 했다. 특히 어린이집에 안 가면서 폭발하면서 짜증 내는 순간들이 한동안 나아지는 것 같더니만 또 주체를 못 하고 심해지고 있다. 

나나 와이프나 최선을 다해서 화를 안 내려고 하지만 피곤할 때나 동생을 때리거나 할 때는 화가 날 때도 있다.

나도 오랜만에 도하에게 엄청나게 화를 내기도 했고... 그래서 고민하다가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중 하나는 칭찬 스티커... 랑 요구하는 거 좀 낮추기, 그리고 화낼 때 빠르게 타협하지 않기 정도만 해보기로 했다.

2020 가을.

로하는 점점 자기 생각이 생기면 서일까 오빠가 화를 내거나 물건을 뺏으면 도하한테 지지 않고 울면서 도하를 때린다. 그래서 아직 두 돌도 안 된 애를 도하도 느끼라고 혼내는데.. 소용은 없는 느낌이다. ㅎㅎ 


로하는 점점 체력이 올라오고, 슬슬 잘 걷긴 하는데, 아직도 손 놓으면 걷다가 넘어질 때가 있다. 도하가 걷는 건 느렸지만 빠르게 적응했던 것이랑은 확실히 다르다.


벌써 겨울이 왔고 겨울의 문턱에서 1000명대의 확진자로 모두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아이들이 잘 크고 있어 다행이다.


올해는 벌써 눈도 왔고, 우울한 코로나 사태인데 눈이나 많이 왔으면 좋겠다....

올해 첫눈.

왜 아이를 낳고, 키울까?


아직도 육아 단계에서 벋어 나지 않았고, 아직도 초보 아빠지만 전체적으로 몇 가지 느끼는 점은 있다. 


생물로써 종을 남겨야 한다는 기저의 본능은 따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도 아이를 키운다는 건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인간은 한문 그대로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어쩔 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결국 관계에서 내가 나온다. 그중 반려자와 아이는 나라는 존재를 가장 많이 비추고 있는 존재다.


시대가 흐르면서 반려자의 존재는 여러 명에서 한 명이 되기도 하고, 이성에서 동성으로 넓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다양하게 변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삶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 걷는 존재라는 것 같다.


그리고 그다음이 아마 아이일꺼다. 아이는 아직 인간이 되기 전의 사람을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인 육아라는 것이 필요하지만 1년만 지나면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3년이 지나면 성숙하지는 않지만 부모와 완전한 관계를 맺는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점점 더 나뉠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향상성을 위한 자본주의를 탑재하였고, 인간으로서의 편리성과 자연보호를 위해서 더욱더 도심으로 몰려든 결과 공동체라는 것은 희미해진다. 그런 인간들의 섬안에서 반려자와 아이가 고립을 해방시켜주고, 그 안에서 내가 단수가 아니게 된다.


그런 존재는 하나라도 더 있으면 더 좋다. 나를 더 풍요롭게 하고, 어느 한쪽이 무너져도 다른 한쪽으로 버틸 수 있다. 아이는, 반려자는, 가족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육아는 더 가치 있고 더 의미 있다.


모성애와 부성애라는 말이 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은 아니고 아이를 나으면 생긴다고 한다. 연구결과들로는 옥시토신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그렇지만 모성애, 부성애는 그런 호르몬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때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옥시토신이라는 기전으로 모성애가 생겼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수십 년간, 혹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한 다는 건 좀 다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아이를 낳고 - 내가 낳은 건 아니다만 - 키우면서 느끼는 점은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온전히 자신을 바쳐야 하는 일이고 그런 너무나 힘든 일에서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결론이 도달한 적이 있다. - 어떤 의미에서 군생활 같은 느낌이랄까. -  


그런 생각에서 큰 틀에 변화는 없지만 최근 아이와 관계를 쌓아가면서 또 다른 추가 요소가 있다. 바로 아이가 나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다.

아이의 세계는 어쩔 수 없이 작다. 처음에는 정말 너무너무 작고, 점점 켜 저가지만 최소 10년 정도는 우리가 갖는 세계에서 너무 일부인데, 나를 너무 사랑해주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때 아이는 정말 맹목적이고 순수하게 나를 사랑해준다. 


우리가 반려자를 만나고, 반려자와 사랑을 하는 그것과는 결이 다른, 아직 '단수'인 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부모가 된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우주고, 그 우주를 온전히 사랑한다. 그 사랑을 받은 우주는 본인이 차갑게 식을때까지 잊지 못한다.

그런 사랑을 받으면 평생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모성애, 부성애의 원천중에 하나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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