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 나는 백수가 되었다.
퇴사를 결심한 건 한 달 전쯤이다.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던 큰 프로젝트를 마치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팀원들과 광화문 회사 근처에서 즐겁게 점심을 먹었다. 하지만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복부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자주 복부 통증을 느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약국을 찾았는데, 약을 먹을 새도 없이 통증의 정도가 심해졌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겨우 이끌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애써 참아보려고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나오는 상황. 결국 팀 선배에게 상황이 좋지 않음을 말했고 혼자 거동하기도 힘든 나는 선배의 부축을 받고 회사 근처 병원을 찾았다.
내가 갔던 병원은 벌써 몇 번이나 위내시경, 복부 초음파 등 건강검진을 받았던 곳이다. 회사 바로 옆에 대학병원이 있었지만 진료 기록이 남아있는 병원에 가야 할 것 만 같았다.
의사는 날 보고, 올해 초 받은 검진 결과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이렇게 통증이 심한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며 아무래도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소견서를 내밀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 회사에 가지 못한 채 집에서 끙끙 앓았다.
그 날, 퇴사를 결심했다.
사실 난 꽤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대기업 PR을 담당하는 홍보대행사 7년 차 과장이었던 나는 더 이상 일이 즐겁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 탓인지 자꾸만 몸이 삐그덕 대고 있었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여러 차례 여행을 다녀왔지만 소용없었다.
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일하고 있는 걸까?
하루 종일 이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 번아웃 된 상황에서 해답을 얻기 힘들다면 잠시 멈춰보자. 다들 백세시대라고들 하는데 내 나이 이제 겨우 서른둘. 잠시 쉬어간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마주하던 공간에서 벗어나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정답은 아니더라도 인생의 방향성은 잡을 수 있겠지. 그리고 살짝 물러진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겠지.
그렇게 난, 서른둘 백수가 되었다!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