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혹은 조셉을 바라보는 시선
Dear Paul,
폴의 미들네임에 Joseph이 있죠.
Joseph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 이름인데(우리말 성경에는 현지식 발음인 '요셉'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조셉'이라고 할게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난 조셉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독차지해서 형들의 시기를 받았어요.
특히 형들과 부모가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한 뒤로는 더욱 미운털이 박혀서, 조셉이 멀리서 오는 걸 볼 때마다 형들이 비아냥거리곤 했어요.
이봐, 저기 꿈꾸는 자가 온다.
우리가 너한테 절을 한다고?
네가 왕이라도 되어 우리를 다스리겠다는 것이냐!
그리고는 어느 날 기회를 봐서 조셉을 이집트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어요.
조셉은 그곳에서 갖은 고생을 겪다가 극적인 기회에 파라오의 눈에 띄어 능력을 인정받고 일약 이집트의 총리로 발탁되었어요.
이는 당시 파라오가 외부로부터 들어와 이집트인들을 정복하고 제15대 왕조를 열었던 힉소스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어요.
힉소스 왕조를 빠르게 안정시켜야 했던 파라오로서는 이집트 토박이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조셉처럼 뛰어난 지혜와 정략을 펼치는 유능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것이 유리했을 테니까요.
시간이 흘러 이집트와 근동 지역 전체를 강타하는 기근이 찾아왔어요.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열한 명의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냈어요.
그들은 비축 식량의 관리를 총괄하고 있던 총리 앞에 나아와 엎드려 절을 하며 곡식을 사러 왔노라고 말했어요.
그가 자신들이 팔아 버린 동생 조셉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저는 폴의 미들네임을 보면서 가끔씩 3600여 년 전에 살았던 이집트의 조셉을 생각해요.
형들로부터 '꿈꾸는 자'(꿈쟁이라는 비아냥에 가까웠던)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고 마음 깊이 간직했던 사람.
그 꿈 때문에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들에서 한순간에 노예로 전락하여 십수 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는 신세가 되어서도 후회나 흔들림이 없었던 사람.
그리고 마침내 자신 앞에서 그 꿈이 찬란하게 성취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던 사람.
그 조셉과 21세기 뉴욕의 폴 조셉은 많이 닮았어요.
큰 꿈을 꾸고,
누가 믿든 안 믿든 그 꿈을 버리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마음 깊이 간직하고,
쉽지 않은 도전과 역경 속에서도 후회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언젠가는 그 꿈이 찬란하게 성취될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
폴 조셉.
그에 비하면 저는 꿈이 없는 사람 같아요.
지난 편지에서 폴의 말을 읽으며 그걸 깨달았어요.
진짜 중요한 건 지금보다 더 큰 꿈을 꾸는 거야.
어떻게 하면 세상에 더 큰 흔적을 남길 수 있을지
두려워하지 말고, 더 크게 뛰어들어 봐.
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크게, 더 크게,
세상에 커다란 흔적을 남길 만큼.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본 것 같아요.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든가, 민족중흥의 사명을 다한다든가, 인류 역사의 진보에 기여한다든가.
하다 못해 자녀에게 유산으로 뭘 남겨 주겠다는 생각도.
그런데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그것도 커다란 흔적을?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둘렀던 진시황이 쌓아 올린 만리장성도 위성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데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수로 그렇게 큰 흔적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나는 참 작구나.
사람은 꾸는 꿈의 크기만큼만 커질 수 있구나
새삼 폴이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3600년 전의 조셉이 그랬던 것처럼 뉴욕의 폴 조셉도 세상에 흔적을 남길 만큼 큰 꿈을 꾸고 있죠.
폴은 그 꿈의 크기만큼 큰 사람이에요.
설령 그 꿈이 모두의 눈에 성취되어 보이기 전까지는 누군가 '저기 꿈꾸는 자가 온다'고 할지라도.
...
지금부터라도 그런 꿈을 찾아보려 합니다.
이왕이면 저도 큰 꿈을 꾸어 보려고요.
크게, 더 크게,
세상에 흔적을 남길 만큼 충분히 큰
저만의 꿈을.
도전해 줘서 고마워요.
Sincerely,
Dani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