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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May 25. 2024

어쩌면 내 속에도 '나무'가 자란다

그냥 제주 살아요 :  나무처럼 오늘을 봐야 하는 이유


나무의 속도라는 것


“저녁이면 나는 벌판에 나가 내 그림자를 펼친다. 어스름 내리는 땅 위에서 팔다리와 그 그림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노닐고, 각도와 빛과 그 외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운 좋은 날이면 나와 내 그림자는 어느새 나무가, 그것도 막 새잎이 움틀 것만 같은 가지를 마음껏 펼친 나무가 된다. 물론 나는 여전히 나무가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적어도 나는 나무의 그림자로 다시 태어났다”

인도의 시인이자 소설가 수마나 로이의 「내 속에는 나무가 자란다(How I Become A Tree)」를 아껴 읽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책 욕심 하나는 뒤지지 않았던 터라 이런 모습을 낯설어하면서도, 책장을 넘기는 것에 점점 더 인색해진다.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다. “나는 속도에 질려 버렸다. 나무의 시간을 살고 싶었다”는 작가의 내적 외침이 내 마음의 소리처럼 쟁쟁 울린다. 새해 다짐이란 걸 해놓고 이제나저제나 시작하거나 포기할 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빤한 속내를 일부러 들키고 자기위로를 하는 과정을 서두를 수 있을 리 없다.



현재, 순간, 지금


작가가 그랬던 것 처럼 가만히 우뚝 솟아 생장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활동만 영위하는 나무가 되어 보기로 했다. 생각만큼 쉽지 않다. 열심히 산다고 했을 뿐 한번도 ‘나’라는 존재 자체에 집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나무-되기'란 흔들리 않고 뿌리 내리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그늘을 내어주고, 열매를 내어주고, 기둥도 모자라 마지막 남은 밑둥까지 내어주는 그런 마음을 견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현재', '순간', '지금'에 집중하는 일이다. 그 순간만큼은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가감없이 내려놓는다.

전에 내가 무엇을 했건, 그 때 그랬더라면 하고 생각해 보는 것도 다 부질없다. 가고 오지 않는 것들이다. 이제 이렇게 하면 혹시, 내가 지금 이만큼 하는데 설마 하는 것들도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이다. 이제 집에 가면 이 것도 해야 하고, 세상이 불편한 아들과 선문답을 해야 하는 고민스런 현실도 지금은 내 몫이 아닌양 모른척한다.



'나무-되기' 그리고 '나-되기'


‘나무-되기’가 마냥 편안하고 건설적인 답을 주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이 평화롭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돌아올 것을, 내 자리가 있는 것을 알고 선택한 평화는 제한적이나 더 감각적이다.

어쩌면 작가도 그런 느낌을 가지지 않았나 싶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보다 견고하고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피할 수 없으니 고요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을 만들라고, 일상으로 복귀했을 때 스스로를 지탱하는 무형의 힘을 챙기라고 경험과 표현을 통해 설명하는 듯 느껴졌다.


나름의 철학과 맞닿아 있는 부분도 감동적이다. '낡음'에 대한 해석이다. 간혹 '폐'와 '헌'의 사용을 놓고 논쟁을 하는 것과 연결된다. '폐'라고 하면 버려지는의 의미가 강하고 더이상 쓰지 못할 것이란 가치 폄훼가 전제되지만 '헌'은 다르다. 나무가 그렇다. 나무의 시간, 그러니까 나이테, 바래고 변한 색, 벗겨진 껍질과 옹이는 나무의 가치를 증명하는 척도가 된다. 사회의 시선, 생존 경쟁에 치여 아등바등 하면서 잃어버리고 놓치는 것들 말고 오랜 시간을 묵묵히 굳건히 견디고 살아내는 힘을 보자는 빤한 얘기가 새롭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나무’라는 단어를 입에 물고, 나무의 속도에 맞춰 제주를 보다 보니 예전에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올해 꼭 40살이 되는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과 이제 곧 개관 30년인 제주탑동해변공연장이다. 두 곳 모두 특별한 출발을 했다.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민속과 자연 분야를 구분해 제주 문화의 고유성과 특이성을 담은 종합박물관, 제주탑동해변공연장은 개관 당시 전국 유일의 바닷가 인접 공연장이자 국내 최초 야외 공연장이란 수식어를 달았다. 지금도 유효하지만, 그 때 만큼 의미 부여를 하지는 않는다. 세월이 그렇다.

제주에서 ‘나무’하면 마을의 중심을 지키며 공동체를 상징하는 폭낭(팽나무)을 먼저 연상하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다. 오히려 이런 공간에 대한 기억이 더 뚜렷하다. 1964년 지어진 뒤 한 시절을 풍미하다 지난해 사라진 제주시민회관이 그랬고, 제주시청 인근 **슈퍼의 존재가 그랬다. 제주 폭낭이 변화무쌍한 제주 거친 바람, 굴곡진 제주 역사를 담고 있다면 ‘시민회관 입구’나 ‘**슈퍼 앞’은 사람이 모이고 흩어진 경험으로 장소성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예전에는’으로 남아있다.



나의 나무가 자란다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과 제주탑동해변공연장의 존재는 마치 나무 같다. 아직 뿌리를 내리고 있고 새잎 움틀 기회를 엿본다. 그 기회가 예전 같지 않지만 존재를 알고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나무의 그림자로 태어날 운이 남아있다. 두 곳 모두 ‘궤 속이나 앨범에 곱져 뒀던’자료를 찾고 있다는 말에 오랜만에 앨범을 뒤적였다. 낡은 사진들 사이에서 그 때 그시절이 당돌하게 고개를 쳐드는 순간 몸 여기저기서 초록 기운이 돋아난다. 존재와 기억의 그림자가 교차하고 공존한다는 느낌이 돋는다. 작가는 아마도 그런 느낌을 말하고 싶었던가 보다. 내 속에도, 작가의 나무와 조금 결이 다른 나의 나무가 자란다.   



*** <열린 제주시> 4월호에 썼던 글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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