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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ul 03. 2023

끈적한 짠내가 묻어나던 그 길에서

제주 '길'에서 묻다 : '귀한' 소금길을 더듬다 2

하늘에서 본 구엄 소금빌레.  사진 출처 : 비짓 제주



옛 자료 속에 듬성듬성 숨어 있는 허연 결정을 찾는 작업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길을 나선다. '소금길'이다. 섬 땅 어디에도 ‘소금길’이라 부르는 길은 없지만 생존을 위해 더듬었던 흔적 만큼은 분명이 남아있다. 아이러니하게 섬이어서 더 구하기 어려웠던 소금은 그 것을 유일한 생계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소금을 구하러, 또 소금과 먹을 것을 바꾸러 다니던 길은 아직도 끈적끈적한 소금기가 남아있는 듯 싶다.     

19세기 말 풍속화가인 김준근이 그린 <염조지인>(소금 만드는 사람)과 <소금장사>. 프랑스기메박물관, 오스트리아 비엔나민족학박물관 소장


구엄 소금빌레 소금 제조과정 재연 모습. 



# 돈이나 쌀보다 귀했던     

제주사람들에게 '소금'은 빼놓을 수 없는 생활문화 아이템이었다. 육지 밭과 바다 밭 말고 '소금밭'이라는 말을 쓰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생업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바다밭이 물 속을 이야기한다면 소금밭은 바다와 육지의 경계에 있었다. 4면이 바다인 섬에서 소금이 귀했던 이유는 지형적 특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염전을 만들 만한 지형이 드물고 소금을 만들기에 ‘물이 싱거워’ 소금 생산이 힘들었다. 자연재해나 흉년이 발생했을 때 다른 지역에서 구황염(救荒鹽)을 배로 실어다 나눠줬던 사정만 봐도 얼마나 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서해처럼 염전을 만들고자 하여도 곧 만들 땅이 없고, 또 동해처럼 해염을 굽자니 물이 싱거워서 100배 공을 들여도 얻는 것이 적다"(「탐라풍토록」중)는 사정은 물론이고 제염을 할 도구도 여의치 않았다.

실제 이원진(李元鎭, 1594~?)의 「탐라지」(1953)에도 "이곳에는 쇠가 나지 않아 가마솥을 가진 자가 많지 않으니 소금이 매우 귀하다"는 언급이 있다. 자연의 힘을 빌려서도,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도 소금을 만들기가 어려웠다는 방증이다.     

소금이 귀했던 배경에는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제약 외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한계도 있었다.

'빌레'라 부르는 평평한 지형을 애써 찾는다 하더라도 소금을 얻을 때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 생산이 쉽지 않았다. 오락가락한 섬의 날씨 역시 소금 생산과는 맞지 않았다.

늦어도 16세기 이후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지역 염전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농상공부가 발간한 「한국수산지」의 자료(3권, 1908)를 통해 그 상황을 가늠할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제주군·대정군·정의군을 통틀어 도내 염전 수는 23곳으로 이들 염전 면적은 모두 합쳐 5만3059평(약 17만5402㎡)에 달하고 연간 생산량은 35만4326근(약 213톤)으로 집계된다. 이들 염전 중 '빌레'(암반)에 굴려서 소금을 만드는 곳이 3군데, 나머지에서는 모래밭에 바닷물을 부어 얻은 함수를 솥에 넣고 불을 지펴 증발시켜 소금을 얻었다. 이렇게 만든 소금의 양은 당시 제주민 100명 중 23명이 먹을 것밖에 되지 못했다.

모자란 부분은 진도까지 나가 미역과 바꿔 구했다. 당시 자연산 제주 미역의 가치라는 것이 전복‧소라보다 앞섰으니 그만큼 소금이 귀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 경작 어려웠던 환경이 만든 ‘밭’

제주에서 소금밭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구엄 소금빌레가 거의 유일하다.

제주시 용담2동에도 현 사범대부속중학교 후문 앞 쪽으로 몰(아래 아)머리 소금빌레와 어영마을 소금빌레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해안도로 개설 등으로 사라지고 없다.

구엄을 비롯한 중엄과 신엄을 통틀어 속칭 '엄쟁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소금 곧 '염(鹽)'을 제조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언제부터 소금을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소금을 만들어 먹고 살았다는 기억은 있지만 단지 그 것뿐이다. 소금 빌레는 그만큼 중요했다. 20년 가까이 마을 어촌계장으로 마을 사정에 누구보다 밝다는 조두헌 옹의 기억을 추려보지만 구엄의 소금 제조사는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다.     

"소금 맨들앙 쇠에 실렁 이 마을 저 마을 댕기멍 보리도 바꽝 오곡, 조도 바꽝 오곡 했주. 구엄 땅이 물왓이란 비가 오민 농사도 잘 안 되곡 해부난 소금을 안 만들민 살질 못했주(소금을 만들어 소에 실어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보리도 바꿔오고, 조도 바꿔 오고는 했지. 구엄 지역 밭들이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비가 오면 농사도 잘 안 되고 해서 소금을 만들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지)"(제주민속유적 295∼299쪽)     

구엄 소금빌레는 단순히 지형적 조건 때문만 발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물이 빠지지 않고 차는 특성으로 인해 밭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바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배로 물고기를 잡았다. 여자의 노동력은 그렇게 소금을 만드는 데 투입됐다.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일에서부터 바닷물을 소금밭에 뿌려 수차례 건조하는 작업, 몇 시간이고 걸어 나가 생필품이나 곡식과 바꾸는 일까지 모두 여자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소금은 80% 이상 여성 노동력에 의존해 생산됐다. 심지어 '큰딸'에게만 물려줬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들었다'는 말 뿐 '기록'이 없다. 


태안 자염 제조 재연 모습
제주 옛 사진 중 '자리돔 장수'

# 소금을 따라 가다


알이 굵고 비교적 양질이어서 임금에게 진상이 되기도 했을 만큼 명품으로 꼽혔던 구엄 소금이지만 판로만큼은 열악했다. 민속지식에 의지해 일년 중에서도 음력 5월부터 8월까지 하늘이 허락하는 만큼 소금을 생산했다. 나머지 기간은 말려 보관 중인 소금을 가마솥에 넣고 물에 넣고 끓여 정제했다.

여기서부터 이미 알고 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대개 바람과 햇볕에 의해 생산되는 천일염을 전통적인 소금이라고 알고 있지만 천일염 이전 우리 민족의 식생활사와 같이 하던 소금은 자염(煮鹽)이었다. 자(煮)는 끓이다, 삶다의 뜻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질박한 토기에 바닷물을 담은 뒤에 끓여서 소금을 채취했다. 끓이는 도구가 철기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뀐다. 처음은 삶은 방식이 연료 사용 등으로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건드렸고 끝내 전쟁에 쓸 화학·군수산업의 원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1942년 소금 생산을 전매제로 일방적으로 전환한다.

그 과정 속에서도 제주는 ‘소금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정 수준 ‘짠 맛’을 만들기 위해 건조한 소금을 다시 끓이는 작업을 반복해 너됫박 정도를 생산하면 바로 팔러 길을 나섰다. 보관이 쉽지 않았다기 보다는 소금을 팔지 않고는 당장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을 만큼 생활이 퍽퍽했기 때문이다.

모든 증발지에 해수를 떠 넣어 저농도 함수를 만들고 이를 다시 몇 개의 증발지에 모아 증발시키는 과정을 통해 중농도 함수를 만든다. 이를 몇 차례 거치다보면 계란이 뜰 정도의 고농도 상태가 된다. 이렇게 진해진 함수는 진흙으로 만든 ‘혹’에 넣어 보관하다 일조량이 많은 날 소금돌에 얹혀 최종적으로 소금 결정체를 얻는다.

오늘 저녁 만든 소금은 바로 다음날 아침 파는 형식이었다. 한번에 30~40㎏나 되는 소금을 지고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만큼 걸어가 팔았다.

동네 어르신들의 기억을 살피면 구엄에서 수산·장전·소길·유수암까지 18㎞ 남짓, 등짐을 지고 한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 되는 거리다. 그것도 시장이 아니라 집집마다 소금 구매 의향을 묻고 되나 말 단위로 팔았다. 소금 값은 조나 보리, 콩, 팥 등 양식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은 덜어지지 않은 무게에 고단함까지 더해져 더 무겁다.

멀리 한림과 제주시까지 나서기도 한다. 제주시까지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꼬박 세시간 거리다. 당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관덕정이나 성안장에서 소금을 팔았다. 여기서는 양식 대신 돈을 받았다. 걸음을 서둘러 중산간까지 나서기는 했지만 산을 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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