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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Jul 03. 2023

엄쟁이‧소금바치…간간하고 서럽던 사연들에 더해

제주 '길'에서 묻다 : '귀한'소금길을 더듬다3

제주 구엄 소금빌레(돌염전)복원지 모습 출처: 비짓제주

#그리하여 지금도 '짠가' 하니


제주 소금 제염 전통은 제주4‧3을 거치며 단절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제주4·3 당시 한라산 입산 금지와 중산간 마을 소개 등 초토화 작전 등을 거치며 소금을 끓일 때 쓸 나무를 구하는 일도 어려워졌고, 무엇보다 주요 소금 판매처가 사라졌다. 한국전쟁이 지나고 나서는 외지에서 소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을 들여 만든 소금에 비해 가격이 헐해 구엄 소금을 찾는 사람이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다. 구들소금이며 산에서 나는 소금(암염) 등의 진입은 구엄 소금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삶마저 흔들었다. 뒤틀린 생활 기반은 다시 현대 문물로 채워졌다. 배수로를 만들어 물 빠짐을 좋게 하는 것으로 밭작물을 키웠고 그 의존도도 높아졌다. 생활이 여유로워지면서 관광과 연계한 산업들도 늘었다. 소금밭, 소금 빌레의 흔적 역시 관광체험용으로 남아있을 뿐 소금길의 흔적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차로 달려 20분이면 제주 도심에 닿을 일이니 과거 서너시간의 다리품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재래식_염전 제염작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그 시절, 짜디짜게 살았던 삶


구엄마을은 ‘엄쟁이(嚴藏伊)’라고도 불리웠는데 이는 ‘소금 곧 염(鹽)을 만들며 살아온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제주에서는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해안에 퇴적된 모래를 활용한 소금을 만들거나 암석 해안 암반을 활용해 해수를 증발시켜 만드는 방식이다. 전자는 종달염전이라하고 후자는 돌소금이라 한다.

이는 구엄마을 돌소금밭이 조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한 기상 조건하에서 반복 제염이 가능했다. 지형상 구엄마을은 비가 오면 밭에 물이 고이는 농업에 불리한 토양 조건이었다. 이에 구엄마을은 마을 포구 ‘철무지개’에서 ‘옷여’까지 발달한 편편한 파식대(岩盤, ‘빌레뜨르)를 제염 장소로 삼아 소금을 생산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제주의 짠 기억은 아직 감칠맛을 낸다.

오성찬의 '제주토속지명사전'(1992)에는 동일리의 소곰밧(마을 바닷가에 소금을 만들었던 동네). 화순리 서쪽 해안가의 소금막(소금을 구웠던 지경). 오조리의 소금막(과거 소금을 제조했던 장소). 조천읍 신흥리의 소금밧(북쪽 해안의 갯벌로 소금을 구운데서 연유). 서귀포시 효돈동의 소금막(아랫 동네 남쪽의 해변으로 소금을 굽는 막)란 지명이 나온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도 소금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마을이었다. 종달리 사람들을 일러 흔히 '소금바치'라 불렀다고 한다. 제주어 '-바치'는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란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종달리의 큰애기덜은 소금 장시 제격이여'(김영돈의 '제주도 민요연구 상'·1981)란 노랫말도 전해졌다. 그만큼 종달에서 소금이 대량 생산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의 종달리 소금 생산량은 제주에서 으뜸이었다. 조선총독부농상공부에서 편찬한 '한국수산지 제3집'에 자세한 수치가 나와있다. 염전평수는 4만7460여㎡로 도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1년치 생산량도 단연 앞섰다. 53톤이 넘었다. 두번째로 연간 생산량이 높았던 시흥리보다 갑절 많았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관련한 내용은 1987년 종달리에서 펴낸 마을지 「지미의 맥」에서 살필 수 있다. 당시 손이 불어터지도록 간수를 날랐던 어르신들의 기억이나 종달리 출신 한국화가인 고 부현일 화백(전 제주대 미술학과 교수)이 그린 20여종의 제염 도구 등이 실렸다.

애월 배무숭이에 남아있는 소금 제조 흔적

#기억으로 기록으로 남은 결정들

산남 중 서쪽은 일과리와 동일1리 두 마을에 걸쳐 있는 날뤠소곰밧에 의존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뻘밭형 소곰밧으로 제주도의 서부지역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크고 소금 생산량도 많았다. 당시는 화폐보다는 물물교환이던 때라 소금 한 되에 좁쌀이나 보리쌀 두 되를 받았다. 소금 물물교환 기준은 그 당시 비슷했을 것으로 보아진다. 유통망 역시 '도보'가 기준이 됐다.

따로 모아둔 소금을 상인이 와서 사가기도 했다. 이 때는 사람이 아니라 가축을 이용한 마차가 동원됐다. 그런 풍경은 1950년대 한국전쟁을 전후해 시나브로 사라졌다. 이후는 직접 만들었다기 보다 공급받았다.

사계마을 자료를 보면 옛 사계포에서는 제주에서 생산된 감자, 고구마, 미역 등의 특산물을 실어 군산과 강정 등의 포구를 통해 육지로 운반했다. 육지에서는 목포의 소금을 싣고 제주로 돌아와 공급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웃동네 알동네로 나눠 작업하던 시흥리의 소금은 1945년까지 생산됐다. 역시 육지에서 값싼 소금이 들어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어 결국 1948년 더 이상 경제성이 없어지면서 결국 바닷물을 보관해 두던 ‘펄못’까지 사라졌다.

애월 '배무숭이 소금밭'은 제주문화원의 현장 조사로 남아있다. 사리때 바닷물이 미치는 곳에 돌담을 쌓아 여러 군데 소금밭을 구획 짓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수로, 바닷물 저장소인 물통을 조성했다. 염전 바닥은 잔돌로 평평하게 다져놓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아 소금을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은 안내판과 소금을 만들었을 때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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