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주 살아요 : 제주 원도심 제이각 쉼터
내 마음이 편안했으면 했을 때면 습관처럼 선택하는 음악이 하나 있다.
일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이사오 사사키의 ‘Sky Walker’다. 단아한 피아노와 건반을 살포시 어루만지는 듯한 바이올린의 선율이 땅과 발바닥 사이에 10㎝ 정도이 공간을 만든다. 겨우 그 정도로 하늘을 걷는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내겐 딱 그 정도의 해방감이면 날개 이상의 효과가 있다. 버티기 위해 날갯짓 하지 않아도 되고, 떨어질까봐 조바심하지 않는 적당히 자유로운 정도다.
언제부터 이 음악을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 듣고 지금까지 한 번도 애청곡 리스트 앞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이사오 사사키의 음악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건 1999년이다. 그 시작도 한 편의 드라마 같다. 한 여성이 음반사에 보낸 편지 한 통이 한 음악인에게 자신이 태어난 나라보다 더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 주는 나라를 만들었다. 연인과의 달콤하면서도 애절한 기억의 일부를 찾는다는 사연에 음반사는 흔한 녹음 테이프 속 음악 하나를 단서로 연주자를 찾는다. 7개월이 걸려 찾아낸 것이 이 곡 '스카이워커'였고 그렇게 발매된 첫 음반이 '미싱 유(Missing You)'가 우리나라에서만 5만여 장 가량 판매됐다고 한다. 숱한 뉴에이지 음악 작곡가 중에서도 그의 곡에 끌리는 이유는 잔잔하면서도 뻔하지 않고, 드라마틱하기 보다는 수줍게 건네는 편지 같은 감성 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리스트에 이 곡 하나만 올려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 그런 계절이다. 내딛는 곳마다 초록이 묻어난다. 시선 닿는 곳마다 초록이 솟는다. 제주의 여름만큼 초록이 빛나는 계절은 없다. 겨울이 지나고 하나둘씩 고개를 내민 새싹들이 눈 깜빡할 새 몸집을 키워 세상을 채운다. 생명력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주에 산다고 하면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라산이나 오름을 굳이 찾아가지 않더라도, 느긋하게 길을 걷다가 우연처럼 시간이 켜켜이 쌓인 초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하늘을 걷는다는 느낌을 배경에 깔아놓고 시간 위를 노니는 그런 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제주시 원도심 한 켠, 오현단과 남수각 복개 구간 사이 구석진 길모퉁이에 숨어있는 곳, 바로 제주 남수각소공원, 일명 제이각 쉼터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일’로 만났다. 소식지에 실을 기사 작업을 하다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능한 가까운 곳을 수소문하다 찾았다. 어쩌면 그 것 때문에 ‘발 밑 10㎝’가 5㎝ 정도로 아슬아슬 해졌지만 나쁘지 않다.
제이각(制夷閣)은 제주도 지정 기념물 제3호인 제주성지 내 부속 건물이다. 안내판 설명에는 ‘제주성 동남쪽 왜적을 제압하기 위한 누각’라고 소개하고 있다. 1599년 왜적을 막기 위해 세웠던 공간은 수백 년이란 시간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뻔했었다. 원도심 재정비와 가치 재평가 여론에 힘입어 2014년 1년여 복원 사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처음 조성됐을 때와는 역할이 달라졌지만 이 곳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여전히 특별하다. 과거 왜적으로부터 제주성과 제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바다를 살필 수 있는 가장 높았던 곳은 지금은 주변 풍경들 사이 숨겨진 예스러운 공간이 됐다. 하천을 끼고 있어 인근에 큰 전통시장이 자리 잡고 있을 만큼 사람들이 모여 살았지만 집중호우나 태풍이면 범람 피해가 반복됐던, 숱하게 많은 우여곡절을 품고 있기도 하다.
제이각은 제주성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이름을 딴 쉼터는 주택가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좀 걸어야 한다. 큰 기대 없이 걷다보면 ‘오오’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제주시에 이런 곳이 남아있어?’로 시작해 ‘왜 여태 몰랐지?’의 반응이다.
규모가 있는 공원도 아니고, 굳이 설명하자면 짜투리 공간을 이용해 조성한 말그대로 쉼터 정도인데 왜 발 밑이 가벼워지는 것일까. 그 특별함은 제주 원도심이 지닌 장소성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 원도심은 1990년대까지 제주의 정치‧경제‧행정의 중심지였지만, 도새ㅣ 개발 과정에서 쇠퇴 수순을 밟는다. 기관과 사람이 떠나면서 과거 번성했던 기억만 남은 공간이 됐다. 원도심 재생 사업으로 최소한 사람이 오고 가는 이유를 만드는 작업을 이어갔지만 예산과 노력만으로는 채울 수 없을 만큼 상처는 깊었다. 그 안에서 역사와 연결된 공간은 관심의 양면성 안에서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보지 못했다. 제이각은 더 그랬다.
제이각 쉼터에는 화려한 조형물이나 볼거리 대신 오래된 건물들을 철거한 자리에 나무를 채워 만든 초록이 있다. 산책을 하면서 공간의 의미와 역사를 음미할 수 있도록 제주성의 정보를 도식화해 안내하고 있다. 무심코 걷다 발 끝에 제주성과 운주당, 오현단, 제주목관아 등이 등장할 때마다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불이 하나씩 켜지는 느낌이 든다.
쉼터 한 켠 ‘급경사지 붕괴위험지역’ 안내판과 동문재래‧상설‧수산시장 이정표를 보는 순간 발바닥으로 대지의 느낌이 올라온다.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다. 쉼터를 조성하며 붕괴위험 경사면을 정비했지만, 비가 많이 내리고 난 뒤에는 종종 범람 흔적이 보인다. 제이각 쉼터 맞은편을 석축으로 완전히 막아 보강공사를 마친 남수각 2지구 절개지가 있다. 지금은 토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나무를 심고 휴식 공간도 조성해 말끔한 듯 보이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절개지 위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공간은 작고 아담한 벽화가 나름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골목이 좁다는 것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원도심 재생 작업을 한다는 것은 이미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살아가게 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곱씹는다.
달력이 무의미하게 날씨가 제멋대로다. 그 흐름에 끌려가기에는 내가 먼저 살아야 겠다. 제이각쉼터 주변을 거닐다가 몇 번이고 발을 멈췄다. 발 아래 공간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아직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떠 있다. 초록의 힘이다. 어쩌면 공간의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옆으로 오랜 시간을 머금은 공간이 공존한다. 공간과 함께 살아온 오래된 초록들이 새로이 초록 대열에 합류한 것들과 손을 잡고 바람을 탄다. 흘러가고 또 돌아온다.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