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멈춰 서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란초 Mar 11. 2022

코끼리의 발

어린이 대공원

코끼리의 발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에 다닐 때 학교가 어린이대공원 근처라서 코끼리를 보러, 더 정확하게는 코끼리의 발을 보러 동물원에 가곤 했다. 덩치에 걸맞는 두툼하고 큰 발로 땅을 딛고 선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다리에도 힘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희미해진 기억들이지만, 20대 초반을 떠올리면 쉽게 부서지고 쉽게 상처 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자주 불안했고 불안을 감추려 안간힘을 쓰며 주먹을 꽉 쥐었다가도, 금세 무너져버리곤 했다. 현실을 직면하기보다 도망가는 편을 택할 때도 많았다. 돌이켜보면, 창피할 만큼 비겁했다.


   한없이 약한 나와는 달리, 자신의 무게를 버티고 선 코끼리의 네 발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달래 지곤 했다. 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누구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날에는 아차산역에 내려 코끼리를 보러 갔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설 때면 좁은 공간에 갇혀 있는 코끼리가 안쓰럽다가도, 내 슬픔을 달래러 올 수 있는 곳이 있음에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한국에서 격리를 마친 남편과 딸이 어린이대공원에 다녀왔단다. 동물원에 있는 여러 동물들 앞에서 사진을 찍은 딸의 모습을 넘겨 보다가 코끼리 사진에서 눈길이 멈췄다. 습관적으로 내 눈길은 코끼리의 발을 찾아 내려갔으나 사진에는 발이 가려져 있었다. 대신 그 앞에 천진난만한 딸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곤 웃고 있었다.


   코끼리를 보자, 잊고 지냈던 지난 날의 감정들이 떠올랐다. 기억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제법 두 다리에 힘이 생긴 지금의 내가 보였다. 웃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자 내 마음에도 행복이 번졌다. 날 보고 웃어주는 아이들이 있어 쉽게 주저앉지 않는 내가 되었구나 싶다.


   여전히 삶에는 문제들이 존재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든든한 존재로 서 있고 싶다. 땅을 딛고 서 있는 코끼리의 발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것처럼, 보고만 있어도 안심이 되는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아이들의 존재가 나를 그렇게 단단하게 빚어가는구나 싶다.


  보고 싶은 딸, 다음주에는 부디 만날 수 있기를 -

(출국 전날, 아들이 pcr검사 양성이 나와 홍콩에서 격리 중)

매거진의 이전글 홍콩에서의 마지막 겨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