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다. 달력 한 페이지를 넘겼고, 날짜로는 한 칸 지났을 뿐인데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게 찬 기운은 아니었는데 하루 만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래 봤자 15도인데 겨울이 왔다며 두터운 옷을 꺼내 입는 걸 보니 현지인이 다 된듯하다.
홍콩에서 처음 맞이했던 겨울에는 반팔 옷을 입기도 했다. 패딩 잠바를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났다. 밍크 조끼를 입는 사람도 있으니 그리 웃을 일도 아니었다. 홍콩에서 다섯 해를 지내며 내 몸도 많이 바뀌었나보다. 곧 전기장판을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의 온도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보기엔 그리 힘든 일이 아닌데도 당사자는 힘들 수 있고, 남들이 보기엔 버거워 보이는 일도 당사자는 괜찮을 수 있다. 각자가 다르게 느끼는 마음의 온도를 가늠하기란 어렵다.
내년이면 한국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홍콩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겨울이겠구나 싶다. 찬 바람 불어오는 이 맘 때면 늘 일에 쫓겨 몰아치듯 살았다. 올 해처럼 이렇게 잠잠히 이 계절을 맞이한 때가 있었던가. 매 해 맞이해도 매번 그토록 마음 시리던 겨울이었는데 올해는 그렇지가 않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던 눈물을 찬 바람 때문이라며 둘러대고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바쁜 날들이 지났다. 내게도 햇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여유 있게 밖을 내다보는 사치를 부리는 날이 주어졌다. 지갑은 얇아졌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두둑하다. 계속 이리 살 수는 없겠지만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을 감사함으로 누린다.
둘째가 태어난 지 백 일이 지나고 홍콩에 왔으니 아이들은 눈을 본 기억이 없다. 아이들은 눈이 내리는 겨울에 한국에 가자고 조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맞는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며 온통 하얘진 세상을 강아지처럼 뛰어다닐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이들처럼 마냥 신날 수만은 없는 현실이겠지만, 새롭게 맞이하게 될 삶의 계절이 찬란했으면 한다. 눈을 보면 마냥 기뻐하는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들은 눈 내린 후 지저분해진 거리와 미끄러워진 바닥을 보며 한숨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 고민들은 잠시 접어두고 찰나이기에 아름다운 나날들을 오롯이 간직하고 싶다.
봄이란 것이 추운 겨울을 지내고 맞이하는 것이기에 더 따스하고 고마운 건 아닐까. 어차피 겪어야 하는 겨울이라면 그 안에서도 즐거운 순간들을 많이 채우고 싶다. 겨울의 초입에서 봄을 그린다. 겨울이 가면 봄은 기어이 오고 말 테니까. 그 당연한 것에 기대어 홍콩에서의 마지막 겨울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