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주 Aug 28. 2020

글에게 배신을 당했을 경우

모순의 글쓰기

글쓰기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한 헛된 기대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글은 글일 뿐 글이 사람을 말해주진 않는다는 사실을, 청년 시절의 많은 부분을 글쓰기에 할애한 결과 깨달았다. 생의 초반에는 생의 뒤통수에 관해 생각할 일이 많지 않듯, 창작을 꿈꾸던 청춘의 초반에는 글의 뒤통수를 대번에 알아차리진 못했다. 아름다운 글을 보며 아름다운 사람을 상상하게 되는 건 천진한 독자로서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사랑에 빠졌을 때, 상대가 변비에 시달려 윗도리만 걸치고 좌욕하는 장면부터 상상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은가.


쓰다 보니 알았다. 글과 글쓴이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청춘을 바쳐 사랑했던 작가 A씨, 알고 보니 개차반’ 같은 배신감을 말하는 게 아니다(물론 그런 순간도 꾸준히 누적되긴 했지만). 내가 직접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나를 구성하는 수만 가지 상태 중 하나에서 비롯된 결과물임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또는 그 수만 가지 상태가 복잡한 화학 작용을 일으킨 결과물이라 해도 좋다. 글은 투명하지 않다.


글이 본디 투명하지 않은 것이라 해서 그럼, 장렬히 펜을 부러뜨린 뒤, 아니 노트북을 뽀갠 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모조리 뽑아다 불태워야 마땅한가? 그럴 리 없다. 그런 방화(放火)는 얼치기나 하는 짓이다. 진짜 읽기/쓰기는 글이 투명하지 않음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글이 투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이 투명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명하지 않은 인간이란 머리에 뿔을 달고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호시탐탐 부정(不正)의 야욕을 품는 인간이 아니다. 외로워 죽겠다며 지나가는 달팽이라도 소개시켜달라더니 갑자기 저를 혼자 있게 해달라며 단톡방에서 뛰쳐나가는 인간이다. 이제부터 남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않겠다더니 인스타 팔로워 수가 올라가지 않는다고 신경질 내는 인간이다. 환경과 더불어 살겠다며 텀블러를 장만하더니 새 텀블러 나올 때마다 계속 사는 인간, 기운 내고 싶은데 기운 내기 싫은 인간, 맹렬히 살고 싶은데 틈틈이 죽고 싶은 인간이다. 우리 자신을 비롯해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인간이 그렇게 한시도, 투명하지 않다.


아동 치료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에 따르면 젖먹이 아기는 모유가 원활히 나올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상황을 ‘통합’하지 못한다고 한다. 젖이 원활히 나오는 만족스러운 가슴과 잘 나오지 않아서 짜증스러운 가슴이 같은 사람의 자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한 사람’에게서 젖이 잘 나오기도 하고 안 나오기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엄마’라는 존재를 수용한다. 인간의 투명하지 않음, 복잡성, 모순 등을 인정하는 것은 발달의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젖을 뗀 인간이라면 내가 사랑한 글과 글쓴이의 아름다움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책에 불을 지르거나 글쓴이의 결함 자체를 부정해선 안 된다. 나는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에 성서처럼 여겼던 작가들의 책을 더 이상 그렇게 여기지는 않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책장에 두고 이따금 꺼내서 설렁설렁 넘겨본다. 어떤 텍스트도 성서가 될 수 없음(심지어 성서 그 자체도…!)을 잊지 않으려고 들춰 본다. ‘작가에게 배신당함’이라는 사실로 하나의 텍스트가 더 생긴 셈이다. 날 짜증나게 했던 가슴도 엄마 거였어! 비로소 그 불편한 조합을 이해하게 된 아기처럼.


나는 수많은 ‘모순의 텍스트’를 해독하려 애쓴다. 모순을 장기간 응시하고 있으면 본능적으로 멀미가 나고 도대체 지구에 소행성 언제 충돌하나 싶지만, 그렇게 불투명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을 때만 보이는 진실들이 있다. 그렇게 불투명한 인간이 만들어낸 글을 환상 없이 소화해야만 보이는 좁은 길이 있다. 그 좁은 길에 들어서야만 내 모순도 드러난다. 우리는 대개 드러나야만 항복하지 않나. 그제야 부끄러움을 안고 슬금슬금 각성하는 것이다. 열 가지 모순을 일곱 가지로 줄여야지. 일곱 가지 모순을 다섯 가지로 줄여야지.


내가 약자였을 때 목격한 폭력을, 처지가 좀 나아졌다고 외면하지는 말아야지. 남의 개소리가 듣기 싫으면, 나도 개소리하지 말아야지. 질서 있는 문장을 썼으면, 공공장소에서 행패 부리지 말아야지. 글과 삶이 일치하긴 어렵더라도, 삶이 글을 전폭적으로 배반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말아야지. 이런 다짐과 실천은 결코 쉽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내 평화와 안락에 유리하다. 거대한 모순을 어느 정도 봉합하면 다이어트할 때 아메리카노에 헤이즐넛 시럽 넣는 정도의 모순이 드러났을 때 읊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내게 보내는 애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부캐가 있었으면 좋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