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주 Jan 30. 2024

아이는 원래 운다

위층에서 매일 밤 아기가 운다. 우는 소리가 나서 시계를 보면 꼭 열 시 전후다. 나로서는 한창 집중력이 올라가는 시간이라 순간적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만약 내게 어린아이를 이해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면. 왜 매일 밤 애를 울리냐고, 저 부모, 애를 제대로 보긴 하는 거냐고 짜증을 부렸을 거다. 아니면 저 집 혹시 애 학대하는 건 아니겠지, 나쁜 상상을 하면서 전전긍긍했을지도. 스트레스가 극심해진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위층 사람들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저기요, 밤늦게 애 울음소리 좀 안 나게 해주세요, 신경질적으로 호소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친동생과 친구와 선배와 후배들에게 어린아이가 있어서, 애를 키워보지 않은 나의 무지를 덜어준다는 것이.


윗집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수년 전 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동생이 낳은 아이, 나의 조카는 한번 재우려면 꼬박 두 시간을 업어 다독여야만 울음을 그치고 겨우 선잠에 이르는 아이였다. 다른 방법은 없었거나, 찾지 못했다. 동생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했다. "설마 스무 살까지 이렇게 재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 무렵, 갓난아이가 잠투정을 하는 이유가 잠드는 일을 죽는 것으로 오인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잠이, 꿈이, 지금 내가 존재하는, 빛과 감촉이 있는 세계로부터 진공의 영역으로 추방되는 일이라면. 울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렇게 무서운 기분을 날마다 겪는 어린 존재가. 어린 존재는 무럭무럭 자라 여덟 살이 되었고 여전히 어린 존재이긴 해도 더 이상 엄마의 등에 업히지 않는다. 걸그룹의 댄스를 따라 하다 지쳐 잠이 든다. 윗집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나는 아직 마주친 적 없는 아이의 엄마를 떠올린다. 아이가 울지 않고 잠드는 날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그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아이들은 언젠가 춤을 춘답니다. 춤을 춘다고 해서 애타는 마음이 덜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울지 않고 춤을 춘답니다.


어린 존재로 인해 애타는 마음을 나는 물론 알지 못하지만. 친동생과 친구와 선배와 후배들이 애타는 많은 순간의 근심을 내게 나누어준 덕에, 어떤 아이들은 부모의 능력/의지/철학/신념에 아랑곳없이 그저 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는 운다. 그냥 운다. 원래 운다. 나는 아이에게, 네가 노키즈존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키가 좀 더 크면 놀이기구를 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듯 키가 좀 더 크면 저 카페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해줄 수 없다. 둘은 같지 않다고 느낀다.


윗집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울음소리가 아니라 뛰는 소리가 들릴 텐데. 그때도 내가, 아이는 뛴다, 그냥 뛴다, 원래 뛴다,와 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쉽지 않겠지만. 어린 존재에게만큼은 조건 없이 마음을 여는 어른이기를 바란다. 나는 어린아이들이 세상은 기댈 만한, 기대할 만한 곳이라고 믿어주었으면 하는 아주 강력한 소망을 갖고 있는데, 왜냐하면 세상은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이 아이에게 그런 믿음을 주지 않을 때 화가 난다. 절망하기도 한다. 수년 전 서울에서 부모에게 장기간 학대당한 아이가 16개월에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잔혹함 때문에 언론에 크게 다루어졌지만 솔직히 한 번도 뉴스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피해 다녔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종류의 뉴스였다. 그런데 어쩌다 그 장면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아이가 사망하기 며칠 전(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어린이집 CCTV에 찍힌 장면. 심신이 다 망가져 하루 종일 교사의 품에 넋 없이 표정 없이 울음도 없이 가만히 안겨만 있던 아이가, 저녁이 되어 자신을 데리러 온 부모를 보자 두 다리로 일어선다. 문자 그대로 젖 먹던 힘을 짜내 부모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부모에게 가려고. 집에 가려고. 아이는 도망을 모른다. 자신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방법들로 폭행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방법을 모른다. 아이의 빌어먹을 우주가 거기에 있으니까. 무너지기 직전의 우주라 해도.


어떤 우주든, 아이는 제 우주를 선택한 적이 없지만.


한 아이를 태어나게 한다는 것에 대해 수년간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친구가 있다. 그 후 친구는 출산을 결정했고 그렇게 태어난 딸아이가 세 살이 되었다. 얼마 전 우리 집에 놀러 온 모녀. 아이는 구김 없이 환하다. 장난감을 가지고 한참 놀더니 갑자기 “또또 어디 있어?” 한다. 두리번거리다가 거실 한구석으로 종종 달려가 무언가를 껴안는 시늉을 한다. “또또 물 줘야 돼.” 어리둥절하는 내게 친구가 웃음을 참으며 속삭인다. “상상의 친구야. 그냥 보이는 척하면 돼.” 아이가 나보고 또또를 잠깐 안고 있으라고 해서, 나는 또또를 받아 안았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물을 먹이고는 다시 거실 한쪽으로 또또를 데리고 간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할 아이의 우주가 있고, 그 우주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우주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주를 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