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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주 Jun 14. 2024

삶이 한낱 꿈이라면

우리들의 구운몽

오래전 국어 선생이던 때, 가르치면서도 매번 어쩐지 난감했던 작품이 <구운몽>이다. 요즘도 교과서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안 그래도 고전문학이라 술술 안 읽히고 풀이할 게 많아 쉽지 않은데 무엇보다 십대들과 ‘인생무상’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그러니까 주인공이 누린 부귀영화는 전부 꿈이었던 거죠.”

”아, 뭐야. 허무해요.“

”바로 그게 주제예요. 인생이 허무하다는 거.“

”네? 인생이 아니라 꿈이었으니까 허무한 거잖아요.“

”그 꿈이 인생이지.“

”꿈이 왜 인생이에요?“

”음, 그러니까 인생이 아주 긴 꿈이라고 생각해본다면.....“

”?“

”....참 덧없잖아요.“

“??”


이쯤 되면 어디선가 짝꿍을 쿡쿡 찌르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덧없는 게 뭐야...?’


학생들 모두가 ‘덧없다’라는 말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 그때 교실에는 아마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었을 것이다. 덧없음을 아는 인간과 모르는 인간. 일찌감치 덧없음을 알아버린 청소년이라면 창밖의 운동장 위로 조각나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시간을 견디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덧없음을 모르는 친구에게 덧없음을 설명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덧없기 때문이다. 설명은 선생의 몫이다.


”영원한 건 없죠. 젊음도, 미모도, 돈도, 명예도, 인기도... 그러니까 너무 그런 것들에 집착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왜요. 죽을 때까지 계속 돈 많고 유명한 사람도 있잖아요!“

”어 그러니까. 결국 죽잖아 모두.“

”다 죽으니까 허무하다고요?“

”그렇긴 한데, 꼭 죽어서 그렇다기보다...“


이쯤 되면 그냥 외우라고 하고 싶어지지만 나도 나름대로 애쓰는 선생이었다.  


”성진은 양소유로 환생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재산도 많고 부인은 무려 여덟 명(...)이고 남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잖아? 요즘으로 말하면 패리스 힐튼(아주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2000년대에 가장 핫한 셀럽이었다)이랄까. 그런데 꿈에서 깨기 직전에, 문득 모든 게 싫증나고 쓸쓸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고 하지. 인간의 삶은 어차피 유한한다는 것을 깨닫는데 때마침 꿈에서 깨어난 거예요.“

”패리스 힐튼은 그런 생각 안 할 것 같은데요.“

”패리스 힐튼이 그런 생각을 하든 안 하든 패리스 힐튼의 삶도 유한하기 때문에...“

”그래도 저는 패리스 힐튼처럼 살고 싶어요!“ “맞아, 존나 부러워.” “우리 엄마아빠는 왜 재벌이 아닌 거지.” ”패리스 힐튼은 한 번 입은 옷은 버린대.“ ”뭐, 진짜? 대박.”

”......“


이런 식으로 수업이 산으로 가다 보면 스스로 아주 무능한 선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놓치지 않는 학생들이 반드시 있다.


“허무한데 뭐하러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요?”


대학 입시와 취업(내가 있던 학교의 학생들은 절반 정도는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을 ‘미래’에 갈아 넣어야 했던 학생들에게 인생의 덧없음을 설파한다는 자체가 사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무언가에 인생을 걸고 있는 아이들에게 인생에 집착하지 말라니. 하지만 적어도, 하나만큼은 말해주고 싶었다.


“여기 지금, 너무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지금은 아니라도 앞으로 살면서 누구나 몇번은 아주 힘든 일을 겪을 텐데,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고통이 조금은 덜어질지도 모르지.”


이런 식으로 무능한 선생의 자존감 회복을 시도한 뒤, 다시 패리스 힐튼으로 돌아가서.


“또 인생이 한바탕 꿈이라는 걸 알면, 나는 왜 패리스 힐튼처럼 태어나지 않았을까, 패리스 힐튼처럼 살지 못하는 내가 참 불행하다, 패리스 힐튼이 너무 부럽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어? 패리스 힐튼도 꿈이고 나도 꿈이고 그저 다 꿈일 뿐인데.”


나름대로 애쓰는 선생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모든 문학 작품이 그렇듯, 구운몽 또한 저렇게만 해석하는 게 늘 찜찜한 마음이 있었다. 교과서에 실린 부분은 구운몽 전체에서 결말에 해당하는, 극히 일부. 소설의 대부분은 꿈의 내용, 그러니까 주인공이 속세에서 누리는 지극한 부귀와 영화의 묘사다. 다채롭고 구체적인, 꽃 같고 불꽃 같은 유희의 향연. 결말이 어떻든 소설 전체를 보면 거 참, 그 꿈 한번 근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지,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니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결론에 직관적으로 이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너머’의 정보까지 전달했다면 학생들의 반응은 아마....


“그래서 허무하다는 거예요, 허무하지 않다는 거예요?”

”집착하라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쩌라는 거예요?“


다시 가르친다면 이렇게 할 것 같다.


“인생이 정말 한낱 꿈이라 해도, 그래서 허무하다고 해도, 우리가 좋은 꿈을 꾸면 기분 좋잖아? 기왕 꿈을 꿔야 한다면 좋은 꿈을 꾸도록 노력해보는 거지. 이불도 빨고, 자기 전에 샤워도 하고, 향수도 좀 뿌리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잠들기 전에 나쁜 생각 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고. 미루었던 사과나 용서 같은 것도 하고. 나에게 가장 큰 사랑을 주었던 사람과 함께 있는 상상도 하고.“


이제 그들도 다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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