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태섭의 <금씨책방> 43 - 적과의 대화
<적과의 대화>, 히가시 다이사쿠 지음, 서각수 옮김, 원더박스
집에서 쓰는 노트북에 와인을 엎질러서 자판이 고장났다. ㅠㅠ
며칠 말렸더니 다른 건 다 되는데 'ㅌ'이 안 쳐진다. 'ㅌ'을 치면 'ㅈ'이 나온다. 그러다보니 '금태섭' 뉴스 검색이 안 된다는 ㅋㅋ
오늘밤이 마감인 원고가 있는데 노트북을 쓸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국회에 나온 김에 겸사겸사 쓰는 독후감.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20년 이상이 지난 1997년 6월 20일. 하노이에서는 전례없는 회의가 열린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국방부장관을 지낸 맥나마라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과 북베트남 외무차관을 지낸 응우옌꼬탁이 이끄는 베트남 대표단이 모여서 전쟁을 둘러싼 서로의 입장을 놓고 토론을 벌인 것.
베트남 전쟁에서 발생한 베트남 측 사망자 수는 약 300만명. 미군은 5만 8,000명이 사망했다. 미군이 사용했던 고엽제 등으로 지금도 수백만 명의 베트남인이 고통을 겪고 있다. 전쟁 당시 양측의 지휘부에 있던 사람들은 과연 이 전쟁이 회피할 수 없었던 것인가 고민을 한다. 양 측에서 전쟁을 다룬 책이나 영화 등은 많이 나왔지만 상대방의 입장을 알기 전에는 '놓쳐버린 기회'에 대해서 알 방법이 없다.
'베트남 전쟁의 공적'으로 지목받던 맥나마라는 1995년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과오였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회고록을 쓴다. 그 책은 베트남에서 널리 읽혔고, 베트남 사람들은 양측이 만나서 그 당시의 입장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맥나마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열리게 된 역사적인 만남에서 양측은 그 유명한 '통킹만 사건'을 비롯해서 전면전의 계기가 된 '쁠레이크 공격' 당시의 보유 정보와 정세판단 등에 대해 서로 솔직한 의견을 주고 받는다.
책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상황들이나 나흘간의 회담이 끝난 후 서로 얻은 교훈을 털어놓는 장면도 흥미롭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전설적인 베트남전의 영웅 보응우옌잡 장군의 이런 얘기. 그는 왜 그렇게 많은 피해를 입힌 미국인, 그것도 맥나마라와의 대화 제안을 받아들였느냐는 일본인 기자(저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 전쟁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끝났습니다. 과거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장래를 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미국과 베트남 쌍방의 인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겠지요. 과거를 잊어버리지 않는 한편, 미래를 응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상대방을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장래를 위해 좋은 관계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히가시 타이사쿠는 NHK에서 일하다가 우연히 이 대화에 대해서 알게 되고 취재를 거쳐 NHK 스페셜로 방송을 한다. 그 내용을 책으로 낸 것. 그는 나중에 정세현 통일부장관과 윤영관 외교부장관을 밀착 취재해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노무현 정부의 노력을 역시 NHK 스페셜로 내기도 했다. 이 방송은 KBS를 통해서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방송이 되었다고.
베트남전에 대해서는 데이빗 할버스탐의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이 유명하지만 미국 측에 대한 분석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 책은 그보다 훨씬 간략하지만, 미국과 베트남의 책임자였던 사람들이 쟁점마다 치열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는 장면은 그에 못지 않게 박진감이 있다. 어딘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읽기 시작할 때는 몰랐는데 예전에 내 책 <확신의 함정>의 편집인이었던 정회엽Hoe Yup Chung 님이 이 책도 편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책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