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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태섭 Sep 04. 2019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결정적 이유

금태섭의 <금씨책방> 42 - 종전의 설계자들

<종전의 설계자들>, 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 메디치



오랜만에 읽은 벽돌책(본문만 628페이지, 찾아보기까지 하면 719페이지).


1941년생인 저자 하세가와 쓰요시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동경대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워싱턴 대학에서 러시아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시민권자가 된 사람이다. (즉 일본국적을 버림) 이 책의 일본어판 서문에는 편집자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내 더듬거리는 일본어를 몰라볼 정도로 손봐주었다."라는 말이 있고, 영어판 감사의 말에는 "담당 편집자인 크리스틴 소스타인슨은 저자의 어색한 영어를 매끄럽게 다듬어주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게 특이한 저자의 정체성은 책의 내용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자에 의하면) 2차대전 당시 일본이 '무조건 항복'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한 과거의 연구는 주로 미국과 일본의 자료에만 의존했었고, 두 나라 지도부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만이 있었다고 한다. 주된 논점 중 하나는, "만약 원폭 투하가 없었어도 일본이 항복을 했겠는가." 였는데 전통주의적 시각은 원폭 투하가 없었다면 일본은 항복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연합국은 일본 본토 공략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 경우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니 원폭 투하는 정당하다) 라는 것이고, 수정주의적 시각은 원폭 투하가 없었어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본토 공략이나 그에 따르는 희생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원폭 투하는 불필요한 행위였다) 라는 것이었다.(라고 나는 무식하고 거칠게 이해함)

러시아사를 전공한 저자는 고르바초프 당시 공개된 소련 자료를 참고하여 일본 지도부가 항복에 이르게 된 과정에는 소련의 참전이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논증을 하고 있다. 소련과 중립 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일본은 적당한 기회에 소련을 졸라서 연합국과의 협상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특히 천황의 지위 보존) 소련이 중립을 지키기는커녕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을 공격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소 사이의 외교전, 일본 내부의 계전파(최후의 일인까지!를 주장하는 강경파)와 화평파(연합국에 항복해서 일본의 존립과 천황의 지위를 보존하자는 현실파)의 갈등 등을 매우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때 일본의 상황은 전쟁을 그만두자는 주장을 하다가 바로 군부 강경파에 의해 암살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즉 종전을 위해서는 외교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합의를 이루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그럼 저자가 보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의미는 무엇인가. 책 마지막 부분에 저자가 미국 대학에서 한 강연이 '보론'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는데 그에 관한 주장이 잘 정리되어 있다. 대체로 이렇다.


1. 일본이 항복에 이르게 된 결정적 요인은 소련의 참전이다. 원폭 투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루만이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할 원폭 투하를 결정한 것은 진주만을 기습하고 연합국 포로들을 잔인하게 살해, 학대한 일본놈들(Japs)에게 보복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일본은 원폭 문제에 대해서 미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2005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드레스덴 폭격 60주년 기념 추도식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대표들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독일인들을 위해 꽃을 바쳤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독일 총리 슈뢰더가 유럽에서 나치 정권 아래 무수한 희생자가 있었다는 사실과 독일 자신의 책임을 먼저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비로소 연합국 대표들이 참례하는 추모식이 열릴 수 있었다.


2010년 히로시마에서 열린 원폭 투하 65주년 기념식에는 전후 처음으로 미국 대사가 참석했으나 어떠한 발언도 하지 않아서 일본인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2차 대전 이후 '대동아전쟁'이 일본의 생존과 안전을 지키고 유럽의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우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제목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비디오 상영을 한다. 이날 기념식에서 연설한 간 나오토 총리도 "일본이 앞으로 핵무기 없는 세계를 건설하는 운동의 선두에 서겠다는 결의"를 표명했을 뿐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슈뢰더 총리가 드레스덴 폭격 희생자의 아픔과 함께 피해자들에 대한 나치의 책임을 얘기함으로써 승자와 패자가 화해할 수 있도록 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원폭 투하에 대해 사과를 하면 태평양전쟁이 일본이 수행한 정당한 전쟁(just war)이라는 주장에 동조하는 꼴이 된다. 태평양전쟁의 평가를 둘러싼 해석이 일본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원폭 투하만을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로부터 독립해서 사과할 수는 없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미국 시민으로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맞선 2차대전은 미국이 치른 전쟁 중 가장 정당성을 갖고 있는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확신한다. 일본은 731부대, 포로에 대한 학대와 살해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전쟁 수행상의 정의'를 위반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사망자들 가운데 비전투원인 시민들의 비율은 95% 이상이고, 나가사키만을 놓고 보면 군인이 점한 비율은 0.00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트루먼 자신도 원폭이 국제법으로 금지된 독가스나 세균전쟁보다 "현저히 악질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미국이 자랑하는 인도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미국 시민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는 잘못이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세계에서 핵무기를 사용한 유일한 국가로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확립하기 위해 앞장서서 노력해야 한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면서 매우 재미있게 읽히는 책. 번역도 매끄럽다. 별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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