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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태섭 Jun 28. 2019

나이 듦, 인간 관계를 정말 와 닿게

금태섭의 <금씨책방> 41 - 레스

몇 년 전에 브래드 피트가 나온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가 인기를 끈 일이 있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 점점 어려지다가 아이의 몸으로 죽은 사람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 영화 덕에 원작인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도 좀 팔렸고.
 
그때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좀 상했었는데, 거의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앤드루 숀 그리어의 <막스 티볼리의 고백>을 막 읽고 너무나 감동을 받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더 잘 썼는데 엉뚱한 책이 각광을 받으니 뭔가 억울한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스콧 피츠제럴드가 후지다는 뜻은 아니지만)

<막스 티볼리의 고백>의 주인공도 태어날 때는 늙은 모습이었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어린 모습이 된다. 책은 죽기 직전의 막스 티볼리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내용. 줄거리 자체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데,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예를 들어 중년의 몸을 가진 15살 때 어느 소녀에게 반하게 되는데 정작 그 소녀의 어머니와 연애를 하게 되는 일, 그 후 나이를 먹어서 청년의 모습이 되어 다시 소녀와 사귀고 결혼을 하게 되는 일 등)과 심리를 절묘하게 묘사해 놓았다.

정치를 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은 서점을 들렸던 것 같은데 요즘은 거의 못 가다가 며칠 전 우연히 교보에 들렀는데 같은 작가의 <레스>라는 새 책이 나온 걸 발견하고 샀다.


중년이 된 작가 레스가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 여기서도 역시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 줄거리지만 나이 듦,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와 닿게 써놓았다. 특히 비유와 묘사가 뛰어난데, 이런 식.


"천재와 사는 건 어땠냐고?
혼자 사는 것 같았다. 혼자서 호랑이와 사는 것 같았다. ...
 
천재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갔을까? 마치 다른 연인을, 나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가 나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을 집에 들여서 함께 살겠다는데, 허락하는 것만 같다.....
 
의심과 함께 하는 삶, 커피 잔의 구슬 선 장식에 딸려 나오는 아침의 의심, 현관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초조한 발걸음, 들려오지 않는 작별 인사-와 귀환에 대한 의심, 타자기의 느린 소리에 대한 의심, 그가 점심 식사를 방에서 먹을 때의 의심, 안개처럼 오후면 사라지는 의심, 몰아내버린 의심, 잊어버린 의심, 새벽 4시, 그가 움찔하고 깨는 걸 느끼고 그가 어둠을, 의심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일..."


2018년 퓰리처 상 수상작. 참고로 소설 속에서 주인공 레스의 나이 든 애인 로버트(위에서 '천재'로 나오는 사람)도 퓰리처 상을 타는데 소설 본문에 의하면 "풀-리-처"가 아니라 "풀-잇-서"로 발음해야 한다고 한다. 우연히 발견한 보물 같은 느낌을 주는 좋은 소설.
 
- <레스>, 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 강동혁 옮김,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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