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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dy Run Feb 29. 2024

겨우 얻어낸 승리 이후

<추락의 해부>

 

<추락의 해부>는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의 추락 사건을 해부하는 엄밀한 법정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엄밀함을 따지고 들어가면 이상한 구석이 있다. 법정 공방이 타살로서의 사뮈엘의 사인과 사뮈엘의 부인 산드라(잔드라 휠러)의 범죄 행위를 밝혀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판 시작 전 사뮈엘 사건에서 확실한 사실은 단 하나뿐이다. 사뮈엘은 눈밭에 엎드린 채 사망했다는 것. 여기에 더해 사망에 이르게 된 과정이 ‘추락’이라는 점은 반론이 제기될 여지가 없는 대단히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럼 사뮈엘은 왜 추락해 사망했는가. 재판은 여기서 시작한다.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부인 산드라가 고의로, 또는 미필적 고의로 완력을 행사해 사뮈엘이 추락했다고 주장한다.


유죄를 입증하지 않는 논증

재판에서 검사가 산드라가 유죄라고 주장하며 제시한 근거를 요약하면 이렇다. 산드라와 사뮈엘은 아들 다니엘이 시신경을 잃는 사고 이후로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이후 산드라의 외도와 사뮈엘의 자살 시도는 봉합하기 힘들어진 균열의 크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유명 작가인 산드라는 작가가 되고자 했던 사뮈엘이 포기한 소설 일부를 자신의 소설에 갖다 쓰기까지 했다. 사뮈엘은 이 문제에 열등감과 자괴감을 가졌다.  


이제부턴 더 사건과 직접 관련된 근거다. 산드라와 사뮈엘은 사뮈엘의 추락 사건 전날 큰 목소리를 내며 싸웠다. 이 부분은 녹취로서 재판정에서 재생된다. 사건 당일 산드라는 한 여성 학생과 인터뷰를 했다. 산드라가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뮈엘은 질투했고, 큰 소리로 가수 50센트의 ‘P.I.M.P’를 틀어 인터뷰를 방해했다고 검사는 봤다. 여기에 더해 산드라는 남편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인물을 과거 자신의 소설 속 캐릭터로 썼었다.


이런 주장들은 영화에서 힘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몰아붙이는 검사의 공박과 관객에겐 제한된 정보, 그리고 단계적으로 흘러나오는 증거들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고 들어가 보면 검사의 주장은 형사재판에서 나오는 논증치고는 이상하다. 정확히는 허술하다. 형사소송의 대원칙 중 하나는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다. 형사 소송을 주로 맡는 변호사들이 하는 말이 있다. “검사 측 주장 2%만 흔들어라, 그러면 무죄 나온다.” 그만큼 형사재판의 유죄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제기될 틈이 없는 확실한 증거와 근거에 의해 이뤄진다.


그런데 영화 속 재판에서 제기된 주장은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산드라의 살인혐의는 유죄로 확정될 수 없다. 산드라가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사건 전날 싸웠다고, 사건 당일 남편이 음악을 크게 틀어 짜증이 났다고 하더라도 산드라가 사뮈엘을 3층에서 밀었다는 건 입증되지 않는다. 이런 사건의 피고인을 대리하는 변호사는 한 문장으로 검사 논증을 무너뜨릴 수 있다. “관계가 안 좋다고 사람을 죽이진 않습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검사의 주장은 사실 산드라의 범죄 혐의 입증과 별 관련이 없다.


영화적 허용을 외면하고 법리적 엄밀함을 따지는 지나친 깐깐함일까. 아니라고 본다. 영화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관객이 <추락의 해부>를 진실의 모호성 또는 주관성, 그리고 최종적으론 진실 불가지론을 다룬 영화라고 평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재판 과정의 공방이 실제론 사뮈엘 추락의 진실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면 이런 평가는 정확한 것일까. 오히려 법정 내 공방은 딴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산드라와 남편의 관계, 그리고 산드라라는 인물 그 자체다. 그 과정에서 해부되는 건 사뮈엘의 물리적 추락이 아니라 산드라의 명예의 추락이다.


산드라 추락의 해부

산드라의 추락은 영화 시작부터 예고됐다. 첫 장면에서 검은 화면으로 “무엇을 알고 싶나요?”라고 묻는 산드라의 목소리가 나온다. 뒤이어 공 하나가 계단으로 통통 떨어진다. 영화가 끝난 뒤 깨닫는 바이지만 이 장면은 이 영화가 결국 추락에 대한 영화이며, 공이 산드라가 있던 층에서 굴러 나온 점을 고려하면 산드라의 추락에 대해 말할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그런 면에서 <추락의 해부>는 내내 차분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영악하게도 기술적인 영화다. 곧바로 사뮈엘의 사망 사건이 이어진다. 영화의 중심축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사건은 관객의 오해를 위해 예비해둔 기술적인 덫이다. 사뮈엘의 사인을 밝히기 위한 재판정의 추리극에 관객은 집중하지만, 이 과정에서 더 분명해지는 작업은 산드라에 대한 인물 연구다.


영화 초반 산드라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좋은 아내며, 아버지 죽음을 접한 아들의 충격을 염려하는 좋은 어머니다. 그러나 검사의 추궁이 계속될수록 ‘좋은’에 대한 재판 방청객의 의심은 커진다. 남편이 자살을 시도할 정도였는데, 그 배경엔 산드라의 남편을 향한 무시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다. 남편의 정신과 주치의가 증언대에 올라 사뮈엘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고 증언할 때 방청객의 의심은 확신 쪽으로 기운다.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는 있을 수 있다. 산드라는 남편의 정신과 주치의 증언에 “전체 상황의 작은 부분”이라고 항변한다. 그는 프랑스어 대신 자신이 편한 영어로 언어를 바꾸면서까지 전체적인 상황이 복잡다단했음을 설명하려 애쓴다. 산드라의 발언은 하나의 인간 또는 어떤 관계를 특정 부분만 토막 내 해부하는 게 전체의 실제를 파악하는 데 무의미하다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단기 판단의 영역에서 그런 진리는 의미가 없다. 산드라와 사뮈엘의 싸움이 녹음된 파일이 재판정에 재생될 때 산드라는 불안한 남편을 달래기보다 날카로운 말로 몰아붙이는 사나운 싸움꾼으로 보인다. 동시에 산드라의 외도, 성적 취향, 남편 아이디어의 표절 가능성까지 치부도 공개된다. 그때 카메라가 비추는 건 의심 가득한 방청객의 얼굴이다.


관객마저 혼란스러워진다. 산드라의 살인 혐의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그녀를 옹호하는 마음과, 과거 남편을 자살로까지 몰고 간 산드라를 비난하고픈 마음. 처연한 표정을 한 잔드라 휠러의 연기는 이 혼돈의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픽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주요 요소다. 그는 아들로부터도 의심을 받았을 때 승용차 뒷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재판에서 증언하기로 한 아들을 보호인 눈을 피해 설득해보려고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산드라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지만, 추락의 순간 존엄이 무너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 산드라가 법정에서 남편과의 과거 관계에 대해 “작은 부분”이라고 항변하며 인정받으려 했던 복잡다단함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분노와 환멸이 지나간 자리

영화에서 산드라 그 자신과, 부부 관계의 복잡한 측면은 인정받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몇 번의 공판으로 유무죄를 가려야 하는 성급한 재판정에서 발췌독하듯 해석되는 삶이 충분히 이해받긴 사실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추락의 끝에 결국 산드라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연한 결과다. 재판에서 산드라의 유죄를 입증하는 근거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락이라는 과정과 무죄라는 결과는 얼핏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 또한 복잡다단한 삶의 한 단면이리라.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기면 보상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냥 끝났어요.” 산드라는 무죄를 선고받은 뒤 파티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냥 끝났다.’ 산드라에게 ‘이겼다’는 표현은 틀린 말이다. 재판 전후로 산드라의 일상은 달라진 게 없다. 그는 기소됨으로써 말하자면 패배하면서 재판을 시작했고, 무죄 선고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이긴 게 아니므로 보상도 없다. 산드라는 아들과 포옹한 뒤 보더콜리 강아지를 안고 잠이 든다. 침대도 아니고 이불도 없다. 쓸쓸하고 외로운 자리다. 안간힘을 다 쓴 뒤 피로감만 느껴진다.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겨우 얻어낸 무죄 선고 뒤의 모습이다. 분노와 환멸이 차례로 지나간 산드라 마음의 자리에 허무와 고독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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