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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ram Nov 20. 2020

숨기는 것도 배신의 행위이다.

아이에게 당당해지기를 요구하다.

원적학급 선생님께 메시지가 왔다.

W가 2교시 후에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이미 전 날에 내가 연락을 받은 터라 4교시 후에 조퇴한다고 말씀드렸는데 2교시 일 리가 없었다.


또 한 번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2교시에 가야 될 리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쉬는 시간에 내려온 녀석을 먼저 만났다.


오늘 2교시 마치고 조퇴해야 해?


어제 한 약속이 있기에 큰 소리로 인사도 잘하고 들어온 녀석이지만, 불리한 질문에는 이미 내 눈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라고 답한다.

이유를 묻는 나에게 "그냥."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님은 어제 4교시 후라고 말씀하셨는데 진료시간이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능청스럽게 그렇다고 거짓말도 못하는 W는 오히려 화를 낸다.


2교시에 가든, 4교시에 가든
어차피 상관없잖아요!


나는 W덕분에 아이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굉장히 쿨 한 교사가 되었다. 예의를 따지기에는 그것이 핵심이 아닌지라 차치하고, 내가 학교에서는 너의 보호자다 따위의 말들은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뻔하기에 접어둔다.


"인정! 맞아. 네가 몇 교시에 가든 그건 상관없을 수 있어. 하지만 그건 너희 담임 선생님뿐 아니라 나에 대한 배신이라 내가 굉장히 불쾌해서 상관이 있어!"


일부러 '배신'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골랐다.

아이는 역시 아이다. 내가 뭘 배신했느냐고 나는 선생님들을 배신한 적이 없다고 발끈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아이와 이 사태를 해결한 과정을 소개한다.





과정 1. 내가 너의 편임을 말한다


"담임 선생님이 너 2교시에 조퇴한다고 연락 왔는데 나는 선생님께 이상하다는 말씀 안 드렸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너한테 직접 물어보려고. 그건 내가 너를 믿는다는 뜻이지."


덧붙여 담임 선생님 또한 너의 편임을 알려주고 싶어서 덧붙여본다.


"내가 어제 담임 선생님께 너 4교시 마치고 조퇴한다고 했는데, 네가 오늘 2교시 후 조퇴한다고 할 때 담임 선생님이 따로 확인 안 하시고 바로 조퇴증 발급해주셨지? 그건 담임 선생님이 너를  믿는다는 뜻이지."


아이는 조용히 끄덕다.



과정 2.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내 마음(생각)을 말한다.


"네 말대로 4교시 마치고 조퇴를 하든, 2교시 마치고 조퇴를 하든 그건 자유다라고 네가 말한다면 그래,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일반적으로 2교시에 조퇴를 하고 병원에 한다는 건 그때 나가야만 진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조퇴를 하는 거 아닌가? 여유롭게 좀 놀다가 쉬었다 가려고 일찍 조퇴한다는 것이 보통의 상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녀석은 여전히 불만스러워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상식선에서, 선생님들은 네가 그 시간에 꼭 나가야 되기 때문에 조퇴 신청을 한다고 믿었는데, 사실은 (솔. 까.) 땡땡이치려고 한 거잖아. 그게 배신이지 뭐야ㅡ. 굉장히 서운하고 마음이 아프다."



과정 3. 아이의 반응을 기다리다.


배신하려고 한 건 아니에요.


W가 정확히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물쭈물하는 혼잣말, 몸짓, 시선과 표정으로 이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뭔가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그런 마음 말이다.

그 마음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기회는 왔다.


"네가 의도적으로 선생님들을 속이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라고 믿어. 단지 넌 어차피 조퇴하는 거 한두 시간 더 일찍 가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겠지. 내 말이 맞니?"


내 말에 W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차피 학교에서 하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 말도 백 번 맞다.

W는 고3이다. 수능을 며칠 앞둔 인문계 학교에서 지금은 자습이 전부이나 W는 수능을 보지 않는다.  이 날 2-3교시 특수학급에서의 수업이 끝나면 하는 일이 없다는 말은 별로 틀린 말이 아니다.



과정 4. 대안을 제시한다.


"어차피 하는 일 없다는 너의 말, 정말 맞아. 학교에서도 어차피 그냥 놀 거, 집에서 노는 거나 다를 것도 없지. 그러니 좀 더 일찍 간다고 손해 볼 것도 없고 잘못될 것도 없다는 생각.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요."


"그런데, 너의 그 생각 그대로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예를 들면 이런 거지. '4교시 마치고 병원 가긴 하는데 어차피 학교에서 하는 거 없으니 한두 시간 더 일찍 집에 가면 안 될까요?'라는 식으로 말이야."



과정 5. 아이에게 나의 기대, 바람을 말한다.


아이는 물었다.

"안된다고 하면요?"


"안된다고 할까 봐 믿음을 배신하고, 슬쩍 빠져나가는 건 비겁함이지. 네가 원하는 것이 나름 정당하다고 생각되면 너의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용기야. 그 생각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말이야. 결과가 두려워서 비겁해지는 것보다는 결과가 어찌 되든 당당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난 분명히 네가 그렇게 말했을 때 너의 이야길 들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과정 6. 아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아까 너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속인 것도 잘못했고, 감정 컨트롤을 못하고 예의 없이 행동해서 잘못했습니다."





아이 스스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기 입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잘못은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잔소리를 남기고, 3교시까지는 수업을 하고 조퇴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남의 시선에 너무나 신경 쓰는 녀석.

무시당하기 싫어서 키가 크고 싶었고,

그래서 키가 180이 넘는 지금도 더 크고 싶은 아이.

덩치도 크면서 근육 빵빵해 보이는 헤비 패딩을 종류별로 갖고 싶어 하는 아이.

가을부터 춥다고 패딩을 꺼내 입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늘 추운 녀석.


1월에 졸업이다.

한 달 밖에 안 남았다.

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리고 그 누구보다 너 자신에게 부디 당당한 모습으로 서길 바란다.


내가 왜 장애인이냐... 하고 말하면서

장애라는 라벨링 뒤에 숨고 싶은 아이.

너의 그 여린 마음이 돌처럼 단단해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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