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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공팔 Feb 26. 2024

이제야  가까워진  아빠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누구나 읽고 나서 한 번쯤 아버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아닐까.

분단국인 우리나라는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두 사상이 이념적으로 경직됐던 시절을 겪었다. 1950-1960년대쯤 세계적으로 냉전이 계속되고 있던 시절도 있었다. 아버지 고영욱 님은 빨치산이다. 빨치산은  본래 정규부대에 속하지 않은 무장 전사를 뜻하는 러시아어 파르티산 (partisan)이 어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미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리산 등지로 들어가 한국군과 싸운 북한 무장공비를 빨치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어느 집 장남이 북으로 도망간 이유로, 혹은 어느 집 누군가는 사회주의를 지지한 전력으로 빨갱이(?)로 불리는 것과는 엄밀히 차별되지만, 포괄하거나 혼용하여 빨치산이라고도 불린다.

소설 속 아버지 고상욱 님은 자신이 빨치산임을 자백해 남한 사회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소시민이다. 그러나  혁명사상만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산다.

당시에 빨치산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들에겐 연좌제라는 무시무시한 낙인이 찍힌다. 직계가 아님에도 출세길도 막힌다. 동네 사람들 본인 포함 그 가족들 마저 백안시한다. 소설은 그랬던 사회아픔을 담고 있다.

하지만 아픈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따뜻한 이야기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아버리고 허망히 돌아가신 아버지 고상욱 님. 빨치산이자 아직도 혁명을 운운하는 고상욱 님의  따님은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인간 고상욱 님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침내 아버지와의 화해를 기대해 본다.

모여있는 아버지의 혁명 동지들에게서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면면보이고, 그런 아버지를 삼스레 간다.


세  사람은 내가 모르는 아버지의 일상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나는 장례식장 사무실에 다녀오겠다며 몸을 일으 켰다. 말년의  아버지가  시간과 마음을 나누며 살았던 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니 그저 그런 정도가 아니라 추레한 노인네 들일뿐이었다.  3초  영감으로 불린 아버지가 저들과 머리를 맞대고 말을 섞는 모습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언제나  민중 운운하는, 너무 근엄해서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마음만은 아직도 지리산과 백운산을 날아다니는 혁명가였다.  72.


# 나의 이야기

사람의 생는 둘 다 어쩜 이리 갑작스러운지. 그날도 평범한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냥 그런 하루. 엘리베이터 안에서 전화가 왔고, 엄마의 울음 섞인 다급한 목소리. "아빠 심정지..."

이게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고, 실제도 그랬다.


뒤늦게 내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엄마의 모습 수분이 다 빠져나간 나뭇가지 같았다. 오히려 아빠가 평온해 보였달까. 그저 스위치를 딱 꺼버린 듯했다. 병실  너무 밝다.

좀처럼 실감이란 게 없었다. 꿈과 현실의 중간쯤. 이게 무슨 일이지. 옆에서 아무리 부르고 주물러 봐도 아빠는 그저 그렇게 있었다. 분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어색해서 닿아보지 못한 아빠의 얼굴이며 피부를 원 없이 만져보고 주물러봤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그날이 내게도 왔다.

장례절차는 유족이 온전히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고인을 확인하고 영안실에 안치하는 일을 제외하면 각종 선택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복이며, 어떤 나무 관이며, 손님맞이 음식, 장지결정,,,)

나의 뇌 기능을 의심할 만큼, 사태 파악이 힘들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엄마는 성실하게 제사를 지낸다. 매번 제사 예절이나 순서가 뒤죽박죽인 것 같긴 하지만 정성만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으뜸이다.

생전에 아빠는 제사 형식을 중이 여기고 제사상 앞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훈수 두시던 분이셨다. 그런 아빠를 친척들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아빠는 책임감과 능력은 없지만, 누가 봐도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돌아가신 아빠가 본인 제사의 격식을 중히 생각할 것이라 여기며, "너네 아빠는 제사가 중한 사람이었으니, 잘 차려 드려야 한다. 안 그러면 화 내실지도 모른다. "  "아니 숙모, 아니라니까요.. 자기 제사 잘 못 차려 준다고 화내고 우리한테 못되게 구는 귀신이 됐다면, 그게 악귀지 내 아빠겠어요? 아빠는 자기 제사 챙기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니깐.."

사실 아빠만큼 본인에게 또 나에게 쿨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타부타 이래아 저래라 하지 않았고, 장남과 결혼했는 줄 알았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 남편이 장남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말했다. 그런 내게 자기 제사상을 아빠 욕심에 맞게 차리라고 요구할 일이 있겠는가.


당시 장례를 다 치르고 후회됐던 건, 아버지 친구였던 분들을 많이 모시지 못했던 것. 나는 전화기에 있는 번호에 모두 따로 연락을 드려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필요까지 없다는 엄마의 말에 나도 수수방관하고 있었는데, 나중에야 소식을 듣고 전화 주신 분들이 몇 분 계셨다. 미리미리 아빠 휴대전화 점검 하며 친구분들 전화번호라도 저장해 둘 걸. 장례식에 오신 친구분들은 아빠가 손재주가  좋아서 기타를 만들기도 했다며 청년시절 아빠 이야기도 전해 주셨다. 그래, 매사에 꼼꼼하고 정확한 사람이었다.

 

우리 가족 저녁식사 때, 술 한잔에 남편이랑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천진하게 웃던 그 모습. 꽤 만족스럽고 즐거워 보였다. 그 시간 속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으셨나 보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며 병원도 안 가던 아빠였는데, 빼곡하게 시시콜콜한 건강정보를 적어놓은 수첩들이 유품정리하며 나왔을 땐 특히 마음이 시렸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아끼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하나를 주고 간다는데, 인생의 반이상을 무표정으로 살았 아빠는 내게 아빠의 웃는 모습을 남기고 갔다. 이다.

국물이 쪼그라든 국수 넣은 라면의 맛, 신문과 책, 바둑 tv, 정자체로 빼곡하게 정리된 꼼꼼한 메모와 스크랩들. 내가 대학 다닐 땐 한자 가득하던 강의 교재에 일일이 토를 달아주기도 했지.


언젠가 딸내미는 물었다.

" 할아버지 죽었으면 하늘나라 가는 거야? 끝이야?"

" 아니~우리 할아버지랑 계곡도 가고, 파티도 하고,  할머니네 놀러 갔을 때 매일 같이 있던 거 기억하지? 그 기억 속에 계속 살아있는 거야. 없는 것 같지만  추억 속에 함께 있는 거야."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32.


이 마음은 내가 명확히 알겠는 마음. 한 사람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남겨진 이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것.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얘기해도 "다 그런 거지 뭐" 하며 새겨듣지 않던 말들. 그저 관념으로만 알던 것었는데. 이런 거구나.

역시 인간은 당해봐야 안다.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가 식사를 잘하시던 모습이 떠올라 밥도 안 넘어가더라. 다행히 꿈에서 항상 웃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했다. 그럼 불현듯 꺼이꺼이 한바탕 울어버리고 그만.

이런 식을 반복하다 알게 됐다. 내 기억 속에서 아빠의 모습이 재구성되며 내가 죽을 때까지 아빠와 함께 사는 거라고. 아빠가 돌아가시고 오히려 항상 함께  있는 것 같은 마음이다.


망자와의 추억을 간직한 마지막 사람의 생이 끝났을 때 비로소 완전한 이별이 아닐지.

 


그런데

아비를 잃은 외동딸의 슬픔과 혁명을 이루지 못한 고단한 고상욱 님의 삶보다 더 흥미로운 이 소설의 묘미는 이런 거다.

의식만 최고, 능력치는 제로인 왕년에 빨치산들을 관망하는 딸의 해학적이면서 무해한 웃음, 애처롭기까지 한 시선. 

독재정권 치하에서 사회주의자가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버지는 초짜 농부가 되었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는 제법 근사할 때도 있었으나 농부로서의 아버지는 젬병이었다. 사회주 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였다. 아버지는 일삼아 <새농민>을 탐독했고 <새농민>의 정보에 따라 파종을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농사를 '문자농사'라 일축했다. 8.
부르주아 빨치산이 또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정말 노동이 싫어…… 노동이 무서워……".
그 말에 아버지가 폭소를 터뜨렸다.
“북에 가거든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마소, 딱 인민재판 감이구만." 152.


문자농사라니, 동이 싫은 부르주아 빨치산이라니.

땀 흘려 일 인간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한 마르크스가 들으면 가히 극노할 발언이다.

다들 북에서 살았다면 매일이 자아비판의 시간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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