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Benaroya Hall 조성진 리사이틀 관람 후기
나는 우리 집 양반 말고 다른 반려자가 있다. 조성진.
남편에게는 이미 익스큐즈 된 사안이다.
반려자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와 나의 나이차가 열 살 가까이라, 내가 평균수명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죽기 전까지 그의 공연을 계속해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다. 최근 모짜르트 앨범 내신 피아니스트 백건우 선생님처럼 조성진도 오래오래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내 반쪽은 우리집 양반이지만 '인생을 함께 한다는' 의미에 방점을 찍은 것. 평생 곁에 남아있을 연주자.
특히 조성진의 쇼팽 발라드 4번은 평생의 bgm이다. 반려음악이라고 해야 할지. 써놓고 혹시 몰라 네이버 찾아봤는데, 내가 의도한 의미는 아니네. 주로 반려동물 끌고다니며 들려주는 음악을 반려음악이라고...어쨌거나 저쨌거나 내 방점은 '인생을 함께 한다는'것. 평생 곁에 남아있을 음악.
(이렇게 쓰니 마치 클래식 애호가 같지만 그렇지도 않은 게, 시경오빠나 잔나비동생 음악도 듣고 이것저것 다 듣는 잡귀다)
나는 조성진을 좋아하고 디시인사이드 피아니스트 조성진 마이너 갤러리를 가끔 배회하는 조갤러 이기도 하다. 아줌마가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조성진의 애칭은 성진쵸, 혹은 갤주.
디시인사이드라니 혹시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조갤은 식갤(식물 갤러리)만큼이나 오늘도 평화로운 곳이다.
시애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문득 갤주가 미국 공연을 해마다 한 번쯤은 꼭 한다는 게 떠올랐다. 이거다 싶었다.
한국에서는 티켓이 1분 컷이라 성공 자체가 쉽지 않으니, 해외에 있는 김에 한번 공략해 보자고.
허무하다.
이렇게 쉽게 손에 티켓이 쥐어지다니.
외국에서 클래식 공연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원래 좀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인가 싶더라. 겨울이라 그런지 기침 소리도 제법 들리고, 전화벨에 진동까지...
가끔은 여기 진공 상태인가? 싶을 만큼 숨소리 조차 안 들리는 우리나라 공연장이랑은 꽤 다르더라.
내 자리는 중앙 Q열.
소리도 잘 들리고 갤주도 잘 보이는 괜찮은 자리였다. 우리집 양반이 관크짓을 못하게 하는데 약간 신경은 썼다. 다만, 나의 고질적인 난시 이슈 + 조명 콤보로 소중한 갤주 얼굴이 번져 보인건 아쉬움.
이 홀은 명당이 아니어도 충분히 연주를 즐길 수 있을 만큼, 공연장 퀄리티는 아주 좋았다.
다음엔 좀 더 저렴한 자리로 가족들 다 데리고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프로그램 구성도 적절하고 안정적. 리스트, 베토벤, 쇼팽 안전한 리스트업에 바르톡으로 중간에 변주를 준 것 같다.
현생이 다망해서 예습은 못 했는데(미리 듣고 가면 확실히 더 잘 들리긴 하더라) 리스트, 베토벤, 쇼팽은 워낙 잘 알려진 곡들이라 훌륭한 곡을 훌륭한 연주로 듣는다는 데 의미가 있었지.
반면 바르톡. 난 잘 모른다. 클래식 음악이 바로크-고전-낭만주의에서 인상주의로 가는 순간 또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것 같은 당혹스러움을 준다. 순간의 인상을 음악으로 표현한거라는데(미술의 인상주의를 차용), 도대체 서사를 따라가는 감성과 서정성을 배제하고 어떻게 음악을 느끼라는 건지. 음악 귀에 또 다른 회로를 뚫어야 할 것만 같다. 하하 그런데 바르톡 인상주의 음악가가 아니라네?그렇게 오해하기 쉽다고. 뭘 또 더 알아야하는 건가. 서사구조가 없고 변주가 많아서 그렇게 들렸나보다.
아직 내 음악 귀가 바르톡을 이해할 단계는 아니다.
그래서 그냥 갤주 연주의 멜로디랑 리듬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이게 꽤 재밌더라. 불규칙 박자 속 다이내믹함이 장난 아니었다. 갤주의 꽝꽝 내려치는 박력 넘치는 타건과 갑자기 힘을 빼고 물방울 떨어지듯 툭툭 건드리는 가벼운 터치의 질서 없는 교차. 거기에 좌우로 밀당하듯 따라가는 리드미컬한 그의 상체 움직임, 가끔씩 슬쩍 위치 바꿔주는 왼발마저도 멋진걸(아줌마 미쳤나)
그런데 하ㅡ우아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 있었던 건,
쇼팽곡 중 두 번째로 좋아하는 쇼팽 왈츠 7번을 갤주 연주로 직관했다는 것.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따뜻한 카페모카 같은 느낌이라면, (아… 연주자 비교하면 안 되나? 근데 이 곡을 워낙 좋아해서 여러 버전 많이 들어봄. 참고로 지금까지 들은 7번 중 최악은 내 연주.)
우리 갤주는 밸런스 좋은 크림 캐러멜 홍차 느낌. 알싸함은 낮추고, 크리미 하고 부드러운 깔끔한 홍차.
인터미션 때 스파클링 와인 마셔놓고 웬 홍차냐. 취했냐.
첫 번째 앵콜은 슈만 트라이메라이. 진짜 꿈같았다.
두 번째 앵콜은 왈츠 14번 한 번 더.
(사리 추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앵콜 연주를 마친 뒤에도 관객들의 기립 박수가 멈추지 않자, 갤주께서 직접 피아노 뚜껑을 닫는 것으로 마지막임을 알리고 퇴장하시었다. 위트까지 있는 우리 갤주 만세.
관객들 호응 좋았고, 공연 전체적으로 너무 만족스러웠다.
비애틀 객지 생활 속 간만에 단비 맞은 날.
또 와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