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트립 #4 LA 도심 투어

헐리우드사인/ Grove/ 여공팔생가/ 게티센터/산타모니카비치

by 여공팔

오늘은 LA 도심 투어 가는 날. 우리 집 양반은 애초에 LA에는 흥미가 없음을 무계획으로 알렸다. 그래서 오늘은 느슨한 J가 내맘대로 기획한 하루.


잘못된 길로 들어서니 드라마 속 장면


아침 일찍 할리우드 사인을 보러 '레이크 할리우드 파크(Lake Hollywood Park)'로 향했다. 번잡한 할리우드 로드 관광은 건너뛰고, 사인을 잘 조망할 수 있다는 명소라기에 찾아간 곳이었지만 실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인을 더 가까이서 보려면 하이킹을 하는 방법도 있는데, 아이 둘을 데리고 이 땡볕에 산을 오를 상상을 하니 이미 등산을 마친 듯 피로가 몰려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LA에 왔으니 의무감에 사인은 보고 가야겠다는 생각뿐, 인증샷 외에는 딱히 기대한 바도 없었다. 게다가 영혼 없는 사진사인 우리 집 양반의 건성인 태도에 김까지 새 버려 대충 사진만 남기고 내려왔다.

근처 놀이터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왔던 길의 반대편으로 차를 돌렸다. 네비가 안내한 길이 이상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면 넓은 도로인데 굳이 이런 좁은 골목길을 안내하나 싶어 볼멘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좁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옹기종기 붙어 있는 단독주택들을 보니 문득 서울의 부암동 풍경이 스쳐 지나갔고.

잠시 사이드 미러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낯선데 익숙하다.

김은숙작가 <상속자들> 속 "나 너 좋아하냐?"의 주인공 이민호가 여주 박신혜를 끌고 갔던, 헐리웃사인이 멋지게 보이던 도로. 그래서 박신혜가 힘든 삶의 시름을 잠시나마 훅 하는 한숨으로 쏟아버리고 싱그러운 웃음을 짓던... 박신혜가 "진짜 헐리웃이네! 완전신기해!" 그 장면 예뻤었는데,

그 사실은 까맣게 모른 체, 바로 그곳의 풍경을 등지고 달리게 되었던 것.

"당장 차 세워! 여기가 바로 <상속자들> 거기야!"

다급한 외침에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차에서 끌려 나왔고, 나 혼자만 흥분해 있었다.

직선으로 뻗은 도로 끝에 할리우드 사인이 걸쳐 있었다. 주변의 풍경과 섞인 할리우드 사인이 훨씬 멋있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몇몇 블로그에서도 이곳을 숨겨진 할리우드 사인 뷰 포인트로 소개하고 있었다. Beachwood Dr와 Winans Dr 만나는 길. 북쪽 방향에 할리우드 사인이 있다.)



The Grove Mall

the Grove mall과 여공팔의 생가...


점심식사는 The Grove mall 구경하다가 눈에 띄던 곳에 들어가서 해결했다. 뭘 먹어도 맛있을 만큼 허기진 상태였다. 몰 중앙부 La Piezza 식당으로 갔다. 맛집까지는 아니었지만 테라스석에 앉아서 중앙 분수 보며 기분 내며 식사하기 좋은 곳이다.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으니 왠지 지금부터 여행 시작인 듯 다시 활기가 생겼다. 애피타이저는 문어 가르파치오, 메인은 피자랑 파스타 먹었다. 특히 문어 가르파치오가 맛있었는데, 슬라이스 한 문어가 쫀득하고 고소했고 소스는 산미와 당도가 적절하게 배합이 잘 된 듯했다. 그로브 몰 안쪽은 Nordstom 백화점과 ALO나 룰루레몬 같은 깔끔한 매장이 즐비하고, 그로브몰 끝 쪽으로 가다 보면 파머스마켓을 만나게 된다. 마켓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저렴하고 다양한 메뉴를 파는 푸드코트형 식당들이 많았다. 여기서 먹어도 좋았을 듯. 우리는 상점에서 주전부리로 말린 바나나랑 망고를 조금 샀다. 그리고 그로브몰 근처에 있는 추억이 깃든 다음 목적지, 예전 내가 혼자 살던 아파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처음 자취생활이란 것을 해봤다. 당시 학교 기숙사에 자리가 없었던 덕분에, 부모님께서는 딸이 안전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큐리티 가드가 상주하는 꽤 고가의 아파트 비용을 감당해 주셨다. 매달 월세와 관리비를 챙기고, 끼니마다 음식을 해 먹고, 화장실 청소 같은 번거로운 집안일들을 하나하나 스스로 해나가야 했던 시간들. 비록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집안을 정갈하게 유지하는 것조차 얼마나 많은 손길이 필요한지 온몸으로 체감했다. 그 시절엔 왜 그리 먹고 싶은 게 많았는지, 친구들과 모여 감자탕이며 양념치킨, 떡볶이를 직접 만들어 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진정한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지영 작가가 <딸에게 주는 레시피>라는 책에서 이야기했던 것 같다. 진짜 독립은 자기가 먹을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을 때에야 진정 독립인 거라고. 독립한 딸을 위해 레시피와 응원의 메시지를 담았던 그 책의 딸처럼(위녕이었나?), 나 또한 그곳에서 나만의 자립을 조금씩 익히고 있었다. 꽤 비싸고 좋은 아파트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저 오래된 아파트다. 아파트는 나랑 꼭 같이 20여 년의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 생기가 빠져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아파트야 재개발 이슈라도 있겠지만, 나는 꼼짝없이 점차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신세겠구나. "잘 있어. 우리 또 보긴 어려울 것 같아. 언젠가는 우리의 기억을 품은 채 너만이라도 팬시한 얼굴로 재건축되길 바라. 진짜 안녕이야."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게티센터, 상처 난 발, 날 사랑에 빠지게 하지마!

석양이 들어오는 잔디. 그러거나 말거나 또 돌아대는 나의 따님.

예전에 봤던 멋진 뷰가 기억나서 다시 게티센터에 방문했다. 힘든 주차 끝에 미술관에 입장하려니 어머나 여기는 예약제이다. 아무 정보 없이 무턱대고 왔지만 그래도 온 게 아까워서 다급하게 그 자리에서 되는대로 가능한 시간을 예약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건 2시쯤이고 예약시간은 4시였는데, 입구 직원에게 미리 왔다고 하니 쿨하게 입장시켜 줬다. 시간을 빡빡하게 맞출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미술관은 높은 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트램을 타고 올라가는데 이건도 나름 무서우면서 재미가 있다.

게티센터는 석유 재벌 J. 폴 게티의 어마어마한 기부금으로 조성된 미술관이다. 리처드 마이어라는 건축가 설계한 현대적 건축물이라고 한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아서 마치 예술 작품 속에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다. 우리나라 리움이나 뮤지엄 산 같은 미술관이 떠오른다. 그리스 로마시대 미술작품들부터 현대미술까지 전 시대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빈센트 반고흐의 <아이리스>.

윌리엄 터너, 함메르쇼이 같은 평소 좋아하고 아는 작가들도 있어서 반가웠다.


(왼)빌헬름 함메르 쇼이,<이젤이 있는 실내, 브래드 가데 25번지>, 1917. (오)빈센트 반 고흐, <아이리스>, 1889.


구스타브 꾸르베, <꽃병에 담긴 꽃다발>, 1862.


요즘에는 구자승 화가의 정물화가 좋더라. 특히 꽃 정물화. 꽃은 사는 순간과 꽂는 과정이나 싱그러운 향기에서 오는 흥분상태에 도취되는 느낌이 좋지만 꽃이 시들면 허탈감을 준다. 반면 정물화 속 꽃들은 견고하게 절정의 순간을 유지한다. 이 말을 좀 더 생활 밀착형으로 풀어보자면, 물을 안 줘도 처음 느낌 그대로의 감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조화를 집에 두면 풍수에 좋지 않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다. 무엇보다 내 느낌엔 구자승 화가의 꽃 정물화 자체가 잘 정돈된 균형미와 무게감 있는 색채가 안정감을 주는 것 같더라. 게티센터에서도 예상치 못하게 만난 꽃 정물화를 보는 순간 여지없이 아이오프닝 됐는데, 쿠르베 작품이었다.


호아킨 소로야, < The Wounded Foot>, 1909.


아 그리고 마음에 깊게 남을 그림 한 점을 보게 된다.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로야. 우리나라에서는 해변을 걷고 있는 여인 그림이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기서 만난 그림은 <The Wounded Foot>. 상처 난 발이다. 상처 난 발이라는 제목과 대비되게 전반적으로 싱그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두 아이가 해변에서 놀다 친구 한 명이 말을 다친 모양이다. "아야 아파!" "어디? 어디? 어디 좀 보자" 정도 대화가 오갔을까?

친구의 상처 난 발을 가만히 들여다봐 주는 모습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생각났다. 얼마 전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고민들을 털어놓았을 때, 내가 깊이 공감해 주지 못한 것 같아 내내 미안한 마음이 남았었다. 그 후회가 마음의 앙금으로 고여 있다가 이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자세히 물어봐 주고 살펴봐 줄걸. 내 주변의 사람들 가족들 모두들 열심히 사느라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 봐 줘야겠다는 오랜만에? 드는 따뜻한 마음을 발현하게 했다. 그렇게 무관심하게 살다가는 고독사 할지 모른다는 경고.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하는 메시지를 건네받은 기분이다.


William-Adolphe Bouguereau , A Young Girl Defending Herself Against Eros, c.1880


우리 아들의 원픽 그림.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사랑의 저항>이라는 작품이라고.

아들이 붙인 이 그림의 부제 < Don't do that> 우리 아드님 눈에는 장난치는 아들에게 눈.을.보.며. "돈 두댓. 그러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제이미 맘의 모습이 보였나 보다. 사랑도, 신화도 다 제쳐두고, 이건 그냥 느닷없이 개입한 어른의 제지 장면인 셈이다.

"아들, 자세히 좀 봐... 이거 큐피드잖아... 큐피드가 화살을 지금 저 여자한테 꽂으려고 하잖니...? 날 사랑에 빠지게 하지 말라는 그런 메시지 아니겠니?"


Alexander the Great Under Water, 1290-1300


흥미롭다. <Alexander the Great Under Water> 13세기말 14세기 초 필사본인데, 역사서는 아니고 판타지 소설 같은 영웅서사시 종류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유리로 된 잠수정을 타고 바닷속을 탐험하는 이야기를 삽화로 넣은 것. 물론 알렉산더가 실제로 잠수했다는 역사적 사료는 없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상상에 속한다. 그림 코멘트는 이 그림이 알렉산더 대왕의 지성과 용기를 묘사한 것이라 말한다. 그만큼 중세인들에게 알렉산더 대왕이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세상 못할 것 없는 전지전능한 능력자로 평가받는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

양피지에 채색을 입힌 필사본이라는 점을 보면, 이 책이 당대에 얼마나 값비싼 물건이었을지도 짐작된다.


프란코 프란체체, <운명> 해 질 녘 게티센터 가든과 LA 전경 속 강렬한 붉은색 조각

산 꼭대기 자리 잡은 멋진 미술관 건축물의 일부가 되어 잠시 여유롭게 건축 경험을 했다. 해 질 녘마저 하나의 예술이 된듯했다.


산타모니카에서 만난 월미도 바이브


시티투어 마지막은 대망의 월미도. 아니 산타모니카 비치(Santamonica Beach)다. 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만, 바다는 그대로인데 여기 바이브가 꽤 많이 달라져서 내가 낯을 가렸다. 여기는 좀 더 과한 월미도다. 기억속엔 관람차만 있었던 것 같은데, 각종 놀이기구들이 데크 한 편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 집 아이들. 놀이기구만 보면 어마어마한 자성에 쇠붙이 당겨지듯 빨려 가는 아이들이라 당연히 타고 싶다고 졸라댄다. 그런데 그런 거 있잖아. 놀이기구 안전성이 생명에 위협을 가할 것 같은 느낌. 당장 눈앞에서 관람차가 돌다가 멈추는 모습을 보니까 애미가 그걸 태우기가 찜찜했다. 엄마들은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며 살게되더라고. 아이들 단념하게 하느라 신경질을 좀 냈고, 대신 오락실에서 탕진시켜주는 것으로 협상 타결.

또 돈으로 평화를 샀다.

결론적으로 LA 시티투어의 마지막 밤은,

놀이기구 기계음과 인파의 웅성거림, 쿵딱쿵딱 음악 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 틈을 비집고 파고드는 기괴한 포교용 마이크 음색이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을 만들지만, 이 또한 혼연일체를 이루어내는 산타모니카 비치의 밤이었다. 그냥 한단어로는 다데기 푼 도가니탕.



아- 오늘도 피로하네. 우리는 밤 운전해서 팜스프링스(Palm Springs)로 출바아아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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