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무 닮은 너를 보면 불편하다, 커피도 그렇다-
커핑(cupping) 노트 혹은 테이스팅(Tasting) 노트는 커피가 가지는 맛과 향을 적는 노트이다.
흔히 원두를 구매하거나 드립백 구매 시 포장지에 적혀있고, 많은 카페의 메뉴판에도 테이스팅 노트가 적혀있어 고객이 메뉴 주문 시 어떤 맛이나 향의 원두인지를 사전에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흔하게 테이스팅 노트에서 보게 되는 표현들이 있는데
'오렌지, 재스민, 다크 초콜릿, 맥아, 자몽, 감귤류, 메이플 시럽, 레몬, 땅콩..'등이다.
테이스팅 노트를 접할 때마다 수강생들은 항상 이렇게 물어보곤 했다.
"선생님, 오렌지 맛이 난다고 하는데, 이 커피에서 오렌지 맛이 전혀 안 느껴지는데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커피에서 말하는 오렌지 맛은 오렌지를 1/1000 정도로 희석한 맛이 느껴진다고 생각이 되면 커핑 노트에 Oragne라고 적는 거예요. 다크 초콜릿이라고 적혀 있다면, 다크 초콜릿 맛이 1/1000 정도 느껴진다라고 생각하세요."
"선생님, 그럼 거짓말 아닌가요?"
"에이~ 거짓말이라뇨. 그 정도만 느껴져도 엄청 좋은 커피인 거예요. 정말로 커피에서 오렌지주스와 똑같은 맛이 난다면 누가 오렌지 나무를 키우겠어요. 커피나무 키우지."
그런데 그 날은 너무나 뚜렷한 시나몬 맛이 났다.
무산소 발효 커피를 커핑 하는 시간이었는데, 커피가 아니라 시나몬 티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무산소 발효 커피의 공통적 특징이 시나몬 뉘앙스라고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가능한가? 발효만으로 이 정도 플레이버가 만들어진단 말이야?'
기대 이상으로 시나몬과 유사해서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럼 이게 뭐야? 이렇게 되면 커피로써의 의미가 전혀 없잖아? 이러면 누가 이 커피를 마시겠어. 차라리 시나몬 티를 마시지. 왜 이렇게까지 한 거지?'
너무나 시나몬 티와 똑같은 맛과 향이 나는 커피는 더 이상 커피로써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몬티와 비슷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한 커피맛이 같이 느껴져야 커피를 마시는 느낌이 들지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가 적당히 어른 같으면 철들었다고 대견해하겠지만 너무 어른 같으면 징그러운 느낌이 드는 것과 같달까.
순간 불쾌한 골짜기 이론이 떠올랐다.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이야기한 것으로 로봇이나 인형이 사람과 닮을수록 그에 대한 호감도가 증가하다가 어느 정도에 달하면 갑자기 강한 거부감으로 바뀐다며 '불쾌한 골짜기'로 설명했다. 하지만 로봇의 외모와 행동이 사람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만큼 로봇에 대해 상당히 호감을 느낄 것으로 예측했다. 너무나 사람과 가까워지면 어느 순간 로봇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불쾌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간을 지나 완벽하게 사람과 똑같아지면 다시 호감도는 상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 커피에서 불쾌한 골짜기를 느낄 일이 생길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다.
1/1000이 아니라 1/10에 가까운 시나몬 맛 커피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시간이 지나 유명한 바리스타인 맷퍼거가 운영하는 웹사이트에 시나몬 게이트라는 게시물이 등장한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에 그런 글이 올라오다니..)
평소 시나몬에 알레르기가 있는 Double B Coffee & Tea 소속의 Dmitry Boroday라는 분이 무산소 발효 커피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느껴 실험 삼아 통에 물을 담은 뒤 생두를 잠길만큼 넣고, 시나몬 스틱을 추가로 넣은 뒤, 나중에 꺼내어 물기를 말린 뒤 볶았더니 무산소 발효 카레의 시나몬 맛과 완벽히 똑같은 향이 나더라는 글이 올라온다.
이 글이 바로 한국 스페셜티 커피 업계를 연초부터 떠들썩하게 만든 시나몬 게이트 사건이다.
워낙 중요한 글이기에 아래 원문을 첨부한다
' Dmitry Boroday, from Double B Coffee & Tea, created ripples in the industry by announcing that he could achieve exactly the same flavour at home, by soaking green beans in a bucket of water laced with cinnamon. Boroday is mildly allergic to cinnamon, and had been promoted to experiment with this, he said, after having a similar allergic reaction to a coffee. Cinnamon-tasting anaerobics were ‘#fakecoffee’, he claimed, nothing more than the result of throwing a few cinnamon sticks into the fermentation tank to boost the flavour.'
그간 일부 농장에서 무산소 발효시킬 때 실제로 시나몬이나 라임, 리치 등을 같이 넣어 발효시키는 거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은 있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조심스러웠던 이슈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된 포스팅이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무산소 발효 커피의 가치와 진위에 대해 상당한 논쟁을 불러왔다.
"실제 현지에서 그런 식으로 하기도 한다. 그걸 모르고 있었냐?"라는 반응부터, '일부 농장에서 그런 일이 있을지 몰라도 시나몬 향은 잘 발효된 무산소 발효 커피의 공통적인 향이 틀림없다'는 의견까지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Natural 커피 가공방식이나 Washed 가공방식도 햇볕에 말리는 과정에서 맛과 향의 변화가 생기고 물로 씻은 후 결국 수조에 담가 발효를 시켜 점액질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발효 시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므로 결국 기존의 가공방식이나 시나몬을 무산소 발효통에 넣어 발효를 시키는 방식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또 다른 가공방식으로 인정을 해주고 다른 카테고리로 취급을 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일부에서는 커피는 결국 농작물이지만 떼루아를 너무 심하게 훼손하는 가공방식은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런 식이면 가향 커피와 스페셜티 커피가 뭐가 다르냐는 불만도 튀어나온다.
이런 다양한 논쟁을 불러온 이유는 시나몬 게이트가 스페셜티 커피업계가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던 가공방식의 투명성에 대한 의구심을 던졌기 때문이다.
스페셜티 커피 업계는 선한 농부들이 소중하게 재배한 좋은 품질의 커피를 투명하게 유통하여 소비자들과 산지 종사자 모두를 이롭게 만들겠다는 이념을 강조해 왔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이념이 많이 훼손되고 말았다
처음부터 실제로 무산소 발효통에 시나몬을 넣는다면, 그렇다고 말을 미리 했으면 큰 논란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발효 과정에 대한 의구심을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끝까지 밝히지 않는 농장주로 인해 현재도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시나몬 게이트로 인해(일부 농장에 국한된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스페셜티 커피 업계는 새로운 화두를 안게 되었다.
'가향과 가미를 하는 커피 발효 방식에 대해 새로운 가공방법으로 인정해줘야 되느냐?'는 문제와 '가향과 가미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 화두들을 풀기 위해 이미 숙성과정에서 다양한 맛과 향을 조율하는 와인의 사례를 참고하여 이 상황을 정리하려는 움직임도 보인다. 커피의 길은 결국 와인의 길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들이 정리가 되어 무산소 발효라는 이유만으로 맛에 비해 너무 비싼 생두 가격은 조금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시나몬향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대회에서 입상이 되는것도 줄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다시 커핑을 한다면 이제 수강생들의 '오렌지 맛이 안 느껴져요'라는 소리는 듣지 못할 수도 있겠다. 커핑 노트에 오렌지라고 쓰여있으면 정말 오렌지 주스와 같은 맛이 나는 순간이 올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