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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술사 Jul 15. 2019

블루보틀이 블루보틀인 이유

블루보틀이라는 이름과 그 푸른 색깔은 어디서 왔는가


잘 알려진 블루보틀과 제임스 프리먼과 콜쉬츠키 이야기


커피를 배우는 과정에서  커피의 기원과 전파, 각 나라별 커피 역사 등을 배우는 건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중에서도 조선인으로 처음 커피를 마신 고종의  일화나 제2차 비엔나 전쟁 때 있었던 콜쉬츠키의 전설은 커피 수강생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신 조선인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이른 시기에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커피를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을 통해 접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이는 고종시대 보다 이전인 1840년 현종 때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1780년 정조 시절,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얻은 이승훈 선생이 40여 일 동안 프랑스 선교사들과 숙식을 하면서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커피를 접했을 가능성도 높다.


고종이 처음으로 커피를 마신 조선인이라는 이야기는, 진실의 논란을 떠나 러시아 대사관에 안위를 의탁한 왕이  커피라는 음료를 처음 마시면서 느꼈을 여러 가지 감정과 그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듣는 이의 마음을 자극하는 매력 있는 이야기다.


커피에 대한 역사와 전설은 그 진실 여부를 떠나 스토리가 가지는 힘이 있다.


유럽에도 그에 못지않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데 빈 최초의 커피 하우스를 열었다는 콜쉬츠키의 이야기다.

콜쉬츠키 이야기는 최근 한국에 오픈한 블루보틀 때문에 더 유명해지고 있다.


블루보틀 커피 창업자인 제임스 프리먼이 콜쉬츠키의 전설과 그의  업적을 기려 자신의 커피가게 이름을 콜쉬츠키가 1686년에 비엔나에 오픈한 'Hof Zur Blauen Flasche(파란 병 커피집)' 이라는 가게 이름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콜쉬츠키는 왜 블루보틀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대체 블루보틀이 뭐길래?


콜쉬츠키라는 이름의 군인/역관/장사꾼


쿨쉬츠키는 164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속했던 지금의 폴란드-우크라이나 접경인 Sambor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폴란드 Samborska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졸업하고 폴란드 군인이 되었다.


장래 폴란드 왕이 되는 얀 소비에스키(Jan Sobieski) 밑에서  그는 Bukovina(현재의 루마니아), 그리고 Moldavia(루마니아, 헝가리, 터키, 러시아, 우크라니아령을 거쳐 현재는 몰도바 공화국) 군사작전에 참여를 하였는데 그때 콜쉬츠키는 루마니아어, 터키어, 헝가리어를 배우게 되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잠시 머물렀을 때는 터키어 통역일을 했고,

1660년에는 비엔나로 넘어가 언어에 뛰어났던 재능으로 비엔나 동방 무역회사에 취업을 했고, 1661~1665년까지 당시 터키령이었던 베오그라드(현재는 세르비아 수도) 지점에서 터키어와 헝가리어의 통역사로 일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는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동방을 제패하고 헝가리를 점령한 다음 오스트리아를 노리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분위기는 점점 고조 되었고, 오스만 투르크 정부가 자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 무역상을 스파이라며 억압하자 콜쉬츠키는, 자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이 아니라 폴란드 시민이라고 주장하여  체포를 피할수 있었다. 그는 즉시  비엔나로 이주해 1665년 Leopoldstadt지역에 정착을 한다.

 

그리고 그 해 Maria Urszula Heissin과 성당에서 첫 결혼을 하였고 (후에 전쟁통에 부상을 입는 콜쉬츠키를 병 간호한 Leopoldina Meyer와 재혼을 한다). 1667년에는 동양 상품을 취급하는 독자적인 회사를 만들었는데 그때 그의 회사는 커피콩을 터키에서 수입하여 팔았다.


1678년에는 다시 이스탄불로 가서 대사관의 군납관, 특사, 통역관으로 활동하였고

1680년에 비엔나로 돌아와 오스만 투르크가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제국의회에 제출하였다.


1682년 쿨치츠키는 카프라 백작 부인의 일로  다시 이스탄불에 갔으며 그곳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포로로 잡혀있던 폴란드 포로인 Jan Michalowicz를 돈을 주고 산 뒤 자신의 하인이자 직원으로 삼았다. (이 포로는 후에 콜쉬츠키가 포위된 비엔나를 통과해 동맹군에 도움을 요청하러 갈 때 같이 동행을 하게 된다.)


콜쉬츠키와 비엔나 2차 공성


평화를 유지하려는 오스트리아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1683년 7월 14일 2차 비엔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스만 투르크군인들은 비엔나를 공격하여 도시 전체를 포위하였다.

1683년 8월 13일 터키 군대에 의해 포위된 비엔나를 구하기 위해 쿨쉬치키는 시종이었던 Jan Michalowicz와 함께 한밤중에 비엔나를 빠져나온다. 그들은 비밀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외곽에 있는 동맹군에 도움을 요청하는 임무였다.


콜쉬츠키는 터키 언어 및 문화에 대한 전문지식을 사용하여 터키 군인으로 변복을 하고 터키군의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심지어 터키 노래를 부르면서 지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오스트리아 군대의 사령관인 Charles V, Lorraine 공작에게 비엔나성의 탄약 부족과 질병에

시달리는 상황을 전달할 수 있었다. 또한 지나오면서 알게 된 터키군의 현황에 대해서도 전달하였다.


그 뒤 두 사람은 같은 방식으로 다시 돌아와 동맹군이 비엔나를 구출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비엔나 시민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었다.


희망적인 소식은 오스만 투르크 군에 포위된 비엔나 시민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고, 1683년 9월 12일 폴란드 왕 얀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국제 연합군이 투르크 군대를 무찌르고 비엔나를 구출해 낼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전쟁 후 콜쉬츠키가 얻은것들


전쟁에서 이긴 후 오스트라아인은 콜쉬츠키의 용기에 보상을 하였다

시의회는 그에게 Loepoldstadt 자치구에 집을주었다. 많은 돈도 주었다.

그런데 보상 과정이 순탄치는 않아, 콜쉬츠키는 전문 작가를 고용하여 자신의 치적을 정리한뒤, 인쇄하여 직접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녔다 한다. 그리고 보상과 관련하여 시의회와 서신을 통해 많은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정말 원했던것은 다른 것이었다.


오스만 투르크군은  많은 전쟁물자를 두고 허둥지둥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코끼리, 말 등과 더불어 유럽에서 보기 힘든 낙타도 있었다.

그리고 자루에 담긴 회색과 초록이 감도는 콩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그 콩이 낙타의 사료라고 생각을 하였다.

오스만 투르크군이 급하게 낙타를 두고가면서 그 먹이까지 다 두고 간거라 생각을 했다.


그러나 터키를 드나들며 일찍 커피 문화를 접했던 콜쉬츠키는 그 사료같이 생긴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커피 콩 이었던  것이다.


전쟁에 승리 한 후 얀 소비에스키 왕은 콜쉬츠키의 노력을 치하하기 위해 그를 불렀다.

그리고 취득한 오스만투르크군의 물자중에 가지고 싶은것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놀람을 뒤로 하고 콜쉬츠키는 그토록 갖고 싶던 커피 콩을 가지길 청했고

그는 오스만투르크군이 두고 간 커피 콩의 주인이 되었다.


커피 콩을 갖게 되자 그는 비엔나에서 첫번째 카페를 열었다.


콜쉬츠키는 자신의 첫번째 카페를 1683년 9월에 전쟁이 끝나고 Singerstrasse 9에 오픈하였다.

그다음 카페는 Domgasse 6에 1684년 2월 27~1685년까지 운영을 하였다.

세번째 카페는 Stephansplatz에 1685~1686년까지 운영 하였다.

세번째 카페 까지는 커피집이라고 말할 수준이 아닌 길거리에서 커피를 파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콜쉬츠키의 카페중 가장 유명한 4번째 카페이자 마지막 카페는  Schlossergasse 에서 1686년부터 1696년까지 약 10년간 운영이 되었다. 콜쉬츠키의 4번째 카페의 이름이 바로 'Hof Zur Blauen Flasche(파란 병 커피집)' 이다.

콜쉬츠키는 그곳에서 오스만 투르크 복장을 하고 커피를 팔았다 한다. 그리고 1694년 결핵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후 블루보틀 커피 하우스는 문을 닫는다.


아래의 그림은 그때를 상상하면서 후대에 그린 그림이다.

그 옛날 블루보틀의 모양이 현재의 블루보틀 로고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전설의 오해와 가려진이야기


이제 그 유명세만큼이나 잘못 알려진 시간도 오래 된 콜쉬츠키 전설 중 몇가지를 새롭게 이야기 해 보자.


첫 번째는 커피콩이 블루보틀, 즉 파란 병에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콜쉬츠키가 자신의 커피집 이름을 블루보틀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커피콩은 블루보틀이 아니라 자루(Sack)에 담겨 있었다.

거칠고 황량한 전쟁터까지 깨지거나 부서지기 쉬운 병에 콩을 담아 가지고 온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수송 및 보관 방법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가지고 온 콩이 생두가 아닌 원두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장에 볶아진 원두를 가지고 왔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낙타의 사료로 의심을 하기엔 원두보다 생두가 더 상식적이다.

생두를 가지고 와서 불에 직접 볶아서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자료에서 자루에 담긴 콩을 이야기할 때  gray-green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생두의 색은 품종과 수분 함유량에 따라 다른데 보통의 경우 막 수확되었을 때는 푸른색에 가깝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두의 색은 품종과 수분 함유량에  따라  푸른색-> 옥색-> 녹색-> 노란색-> 회색으로 변해간다는 걸 생각해 볼 때 생두가 더 맞을 것이다.


세 번째는 비엔나에서는 그때까지 커피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설에는 비엔나 사람들이 커피를 알지 못해 생두를 낙타의 사료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일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일부는 틀렸다. 모든 비엔나 사람들이 커피에 대해 아는 건 아니었지만 콜쉬츠키가 직접 세운 무역회사에서 커피콩을 수입을 하기도 했고, 터키 대사관 납품 리스트에도 커피를 구매했다는 자료가 있는걸 볼 때 전체는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은 커피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 번째는  콜쉬츠키가 만든 블루보틀이 비엔나 최초의 커피 하우스라는 것이다.

최근 연구 등에 의해 드러난 바는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문헌적으로 기록되어 남아있는 최초의 커피는

오스트리아 사학자 Felix Czeike가 쓴 '비엔나의 역사'(Wien 1993)에 따르면 1685년 아르메니아인 Johannes Theodat 이다.


1685년 1월  17일 아르메니아 상인 Johannes Diodato(Johannes Theodat)이 도시에 커피를 팔 수 있는 권리를 받았고, 비엔나에 첫번째 커피샵을 열었다고 한다. 그는 20년간 비엔나에서 커피 영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고 15년 뒤에는 4명의 그리스인이 그 권리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콜쉬츠키가 1683부터 시작한 커피집들은 무허가 영업이었단 말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으나  전설에 따르면 전쟁 영웅이었던 콜쉬츠키에게 솔비스키 국왕이 직접 영업을 허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콜쉬츠키는 왜 '파란 병 커피집' 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파란 병 커피집'은 마치 은행나무 집과 같은 느낌이다.그런데 은행나무집이야 은행나무가 있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쳐도 콜쉬츠키는 왜 블루보틀이라 지었을까?


블루보틀과 무슨 상관이 있어서 '파란 병 커피집'이라 이름을 지었을까?


이것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블루보틀이라는 이름은 그의 두번째 부인인 Leopoldina Meyer가 사용했던 약병이 파란색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콜쉬츠키는 비엔나를 지키다가 총상을 입었다. 그때 집주인이자 의사였던 Georg Mayer의 딸이자 나중에 재혼의 상대가 되는 Leopoldina Meyer가 파란색의 병에 약용 발삼을 담아 곁에서 간호를 했다. 그 무렵에는 발삼을 약용으로 많이 사용하였고 파란색 병을 약병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콜쉬츠키가 커피집을 오픈할 무렵 아내가 간호해주던 일을 떠올려  자신의 커피 하우스 이름을 ‘파란병커피집’이라고 지었다는 설이다.


두번째 설은 자신의 집을 파란병이라고 불렀던 배관공의 이야기다.


Christian Flaschner라는 남자는 1563년에 자신의 집을 산다.

그리고 집의 이름을  'Zur blaue  flasche'라고 명명한다. 다시 말해 자기가 산 주택에 '블루보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Flaschner라는 성(姓)의 뜻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Plumber'라는 뜻이다.

유럽에서는 하는 일을 가르치던 단어들이 훗날 성(姓)이 되어버렸는데 그런  정황을 감안하면, 그 사람의 직업은 배관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 배관공은  아연이나 철, 주석, 구리, 동 등으로  얇은 판을 만들어 구부리고 잘라 랜턴이나, 물 뿌리개, 캔이나 깔때기, 지붕이나 외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병(Bottle)도 만들었다.


Christian Flaschner는 집을 산 후 자신의 집 외벽에 파란 병을 달아 간판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파란 병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병의 파란  색깔은 그 병이 청백색을 띠는 아연/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콜쉬츠키가 그 집에 카페를  차리게 되는데 콜쉬츠키는 블루보틀이 붙어있는 그 집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자신의 카페 이름을 '파란병 커피집(Hof Zur Blaue Flasche)'이라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콜쉬츠키는 블루보틀이라는 파란 병과는 전혀 무관하다.

중세 배관공이 자신의 집임을 알리는 간판으로 파란 병을 달아놓았던걸 그대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른 뒤 제임스 프리먼은 그 이유를 모른 채 콜쉬츠키의 블루보틀을 따 자기의 가게 이름을 블루보틀로 지은 것뿐이다.


블루보틀과 스토리 텔링의 중요성


중요한점은, 전설은 진실의 여부보다 스토리가 가진 힘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가게의 상호는 스토리를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자신의 얼굴과도 같은 상호를 정할때 이점을 꼭 기억하자.


스토리가 없는 상호는 잊혀지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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