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우핑
세월이 차곡차곡 쌓여 만든 연륜이라는 것은 무섭도록 날카로울 때가 있다. 어느 날 아침, 존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네 얼굴이 요즘 행복해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한국어로 대답할 수 있었다면 나는 “아니에요. 껄껄껄. 화장을 안 해서 그래요.” 따위의 말로 재빨리 넘겼을 테지만 영어는 쓸데없이 사람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만들어버린다. “아, 돈이 넉넉지 않아 요즘 걱정을 많이 해서 그런가 봐요.” 무엇을 바라고 이런 말을 뱉어버린 걸까. 고민을 나누고 싶기도, 응석을 부리고 싶기도 했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도움의 손길을 바란 것을 아닐까, 대답을 하고 난 짧은 시간 동안 자책했다. “돈이 얼마나 필요해? 내가 도와줄까?” 뜻밖의 대답은 나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나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어이코,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에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존 아저씨와 나는 꽤 가까워졌다. 아저씨와 내가 한 조가 되어 열매를 따던 날, 아저씨는 은밀한 거래를 제안했다. "킴, 너의 어머니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마카다미아 넛 스프레드를 좀 줄게. 어머니께 보내 드리고, 네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보여드려. 대신 한국까지 운송비는 네가 내도록 해." 나는 엄마를 위해 만드는 스프레드를 상상했다. 내가 직접 나무에 올라 딴 열매를 2주 넘게 말리고, 깍정이를 벗겨낸 후, 벌레 먹은 열매는 골라내고 예쁜 열매를 착즙기에 집어넣는다. 보기보다 많은 양의 마카다미아 넛을 갈아 넣어야 한 병의 스프레드를 만들 수 있다. 곱게 갈린 스프레드가 담긴 병에 직접 라벨을 붙이고 1년이라는 유통 기한을 찍어 포장을 마친다. 엄마가 받아 든 병에는 뉴질랜드산 유기농 마카다미아 넛 100%라고 쓰여 있겠지만, 사실 거기에는 과수원 노동의 짠맛과 부모님을 향한 내 짠한 마음이, 엄마 말 안 듣고 외국에 나가서 생긴 고소한 맛과 낯선 이가 멀리서 베푼 은은한 달콤함이 들어 있다.
마카다미아 넛 스프레드에 대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살찌우는 영양분에 대해서도 배웠다. 우리가 모아둔 음식물 쓰레기는 타이거 웜이라는 지렁이가 먹어 치운다. 이 지렁이 오줌을 소중히 모아다가 맑은 물에 희석해서 마시면 태평천하 윤직원 영감처럼 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나무는 건강해진다. 산후조리에 좋은 미역도 훌륭한 비료가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역을 채취하러 바다로 가야 했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러 간다는 마음에 들뜬 우리는 작업복과 장화를 벗어던지고 따라나섰다.
우리는 Bethells 해변을 지나 조용한 누드 비치로 향했다. 밀려온 바닷물이 누드비치 진입을 막고 있었다. 기껏 갈아입은 옷과 운동화를 적시기 싫어 움물쭈물하고 있을 때, 마커스가 미역 운반용 수레를 내밀었다. 마커스는 신발과 바지를 몽땅 적셔가며 한나와 나를 누드 비치 입구에 내려 주었다. 뒤늦게 도착한 존 아저씨는 장화를 거꾸로 벗어 흔들며 스며든 바닷물을 쏟아냈다. 그의 바지도 바닷물에 흠뻑 젖었다. 누드 비치의 바다는 이런 방식으로 천천히 옷을 벗길 셈이었을까. 검은 모래 언덕을 넘어 도착한 작은 비치에는 긴 머리를 풀어헤친 커다란 미역만이 헐벗은 채로 누워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무거운 미역을 둘러업고 모래를 털어 포대에 담았다. 깨끗이 씻겨 발효통에 넣은 미역은 바다를 머금은 영양분을 땅에 전할 것이다. 널브러진 미역들을 수레에 싣고 돌아가는 길, 한나와 나도 결국에는 운동화와 신발을 적셔야 했다.
과수원을 떠날 때가 되었다. 결국 엄마에게 마카다미아 스프레드를 보내지는 못했다. 적은 돈이라도 아껴야 캐나다에서 일을 구하기 전까지 버틸 수 있다는 핑계가 나를 주저하게 했다. 통장에 있던 대부분의 돈을 캐나다 달러로 바꾸고, 토론토에서 지낼 임시 숙소를 마련하고, 비행 일정을 체크했다. 밴쿠버에서 밤 비행기를 타고 이른 아침 토론토에 도착하면 하룻밤의 숙박비를 줄일 수 있다. 나는 시간만큼은 넉넉한 여행자니깐 하루쯤은 공항에서 보내도 괜찮았다. 과수원을 떠나 공항으로 향하는 날, 존 아저씨는 스프레드 한 병을 선물로 주었다. 원래라면 엄마가 받아야 했을 선물이다. 오늘도 언제쯤 한국에 올 거냐며 귀국을 재촉하는 엄마에게는 김치찌개가 너무 먹고 싶으면 돌아가겠다는 문자를 남겼다. 엄마는 또다시 낯선 땅에 홀로 떨어질 나를 걱정했지만, 오빠는 뉴질랜드에 이어 캐나다까지 기념 선물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을 기대했다. 나는 우리 오빠의 이런 식의 염려를 좋아한다.
뉴질랜드 풍경이 그려진 엽서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존 아저씨와 수에게 전했다. 마땅한 선물이 없어 율곡 이이가 그려진 한국 지폐를 기념품 삼아 엽서 봉투에 넣었다. 남의 나라 크지 않은 돈이지만 그래도 돈이니깐, 쉽게 버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내가 살아온 삶을 가로로 툭 잘라 나의 연륜, 그러니깐 나이테를 살펴보면 뉴질랜드에서 보낸 8개월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강한 햇살과 풍부한 강수량 덕분에 쑥쑥 자라는 뉴질랜드 나무처럼, 급격한 모양 변화는 없지만 간격은 훨씬 넓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 나무를 베어다가 테이블을 만들면 두드러질 그 무늬를 나는 아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