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자, 일단. 손가락이 굳기 전에.
본디 내 꿈은 글쟁이었다.
다른 애들은 숙제로 제출하기 위해 쓴 일기를 나는 스스로 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 내 손에는 용돈이 쥐어졌다. 월요일에 삼백원, 금요일에 이백원. 학교도 들어가기 전 일곱살짜리 꼬마에게는 꽤 큰 돈이었다. 아끼고 아껴서 천원을 만들면 큰 돈이 생겼다고 뿌듯해 하기도 했으니까. 어느 월요일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엄마에게 백원짜리 세개를 받았다. 피아노 학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없듯 나도 모르게 걸음한 문방구에는 이제 막 새로 들어온 노트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일기'를 발견했다. 이백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손에 쥔 일기에 두근거렸다. 온전히 내 이야기로 채울 수 있는 특별한 노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그 일기장에는 '일기'를 갖게 된 계기가 소상히 적혀 있었다.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엄마께서 착한 일을 했다고 일기장 값 이백원을 주셨다.
엄마는 일기를 쓰는 일이 착한일이라고 했다. 일기장의 주인은 '나'이고 '오늘'은 날짜에 쓰여 있으니 '나는 오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운 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나는 오늘'이 사라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쓰는 습관이 시작된 건 꽤 오래되었다. 나이에 앞자리가 생기고, 한번 더 생긴 오늘까지 나는 꾸준히 무언가 쓰는걸 즐기고 좋아했으니까.
본디 내 꿈은 글쟁이었지만, 나는 글쟁이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이과생이었다. 누군가 이과를 가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장래희망란에 쓴 직업과 전혀 연관도 없었다. 하지만 이과를 선택했다. 빼어나게 수학이나 과학과목을 잘 하는 것도 아니었고, 죽어도 이과에 가야지 하는 의지도 없었다. 내가 이과를 가겠다고 이야기 했을 때, 내 친구들은 모두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고등학교 편집부 활동을 하고 있었고 시인이셨던 교장선생님의 관심도 받고 있었으니까. 왜 이과를 선택했냐는 물음에 답은 언제나 한가지었다.
- 굶어죽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현실이었다. 좋아하는 일만 하고서야 먹고살 수 없는 것.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잘 해내기는 어렵다는 것. 세상에는 고만고만 나와 비슷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 넘쳤고, 나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은 훨씬 더 많았다. 글로 먹고 살기엔 내게 엄청난 재능도 없었고 그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꾸준히 끼적댔다. 편지도 쓰고, 일기도 쓰고, 수행평가 제출을 위한 독후감도 쓰고, 편집부 일도 하고.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는 걸 좋아했고 '잘 쓰네.'하는 칭찬을 들으면 매우 기뻤다. 하지만 나는 이과를 선택했고 공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특이한 사람이었다.
공대는 나에게 참 삭막한 곳이었다. 모든 것이 수치화 되어 있었고 딱딱한 내용들이었으며 낭만도 없었고 상상도 없었다. 그래도 그냥저냥 다녔다. 졸업하면 뭐든 하겠지, 어디든 취업하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공학윤리> 레포트를 준비하던 순간을 선택할 것이다. 처음으로 연습문제 풀이가 아닌 '레포트'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하나하나 다 읽어보며 문장을 선택하고, 관련된 내용을 찾아 정리하던 그 봄날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 레포트는 A+였다. 대학 내내 이런 수업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공학인증프로그램은 내가 4년동안 들어야 하는 과목을 지정해주었다. 콘크리트 벽 같은 대학생활이었다. 그래도 대학 졸업장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외할머니의 간곡한 말에 졸업은 했지만 끝끝내 전공을 살리지 못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시점에, 친하게 지내던 대학 선배가 그랬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되면 더 이상 좋아하는 일이 될 수 없다고. 글쓰는 것을 싫어하게 되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나름 재미 있었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다.
글쟁이는 하늘이 내리는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는 재능이 없었다.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드는 문장도 없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웃음을 줄 수도 없었다. 지금도 매한가지이다. 그래도 쓰기로 결심했다. 뭐든 쓰다보면 무언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에. 혹은 손가락이 굳지 않기 위해.
잡다하지만 기록하기로 했다. 그래서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