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이름은 멍멍이, 강아지 이름은 야옹이
스무 살, 대학 1학년, 신입생. 계획에도 없던 공대에 5차 추가합격. 뭘 들어야 할지 몰라 시간표도 엉망, 남들 다 있다는 공강 날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봄옷 입기엔 너무 이른 꽃샘추위와 낯선 환경. 마지막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던 금요일이 떠오른다. 술 한 잔 마시러 가자는 동기들의 말에 있지도 않은 약속 핑계를 대고 얼른 빠져나왔다. 술이 약해 조금만 마셔도 얼굴 빨개지고 몸이 아픈데 애들은 매번 술 술 술이었다. 나랑 잘 맞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4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암담한 미래, 흐린 날씨, 어둠이 내린 하늘, 조금만 걸어도 발이 아파오던 7센티미터 하이힐.
대학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대학 물리학 수업 시간에는 공부보다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물리를 선택하지 않아 기본도 없던 내가 어떻게 고급물리학 공부를 할 수 있었겠나. 대학생 받아주는 학원은 없나 지루해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 시간까지 공학용 계산기 준비해주세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 계속 사용할 거니까 미리 사 두세요.”
공학용 계산기? 일반 계산기랑은 다른가? 낯설기 그지없는 계산기의 수식어. 필요하다니 사긴 사야겠지 생각하며 문구점에 갔다. 액정 두 줄짜리는 이만 원, 세 줄 짜리는 삼만 원. 뭘 사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기왕 사야 하는 거 비싼 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삼만 원짜리를 집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산 공학용 계산기에는 로그 자연로그 삼각함수 등등 고등학교 내내 연습장에 쓰고 계산하고 외워야 했던 값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버튼이 쫙 펼쳐져 있었다. 우와 이게 뭐야! 진짜 우울하게 생겼네! 공학용 계산기의 첫인상은 우울 그 자체였다.
실은 내가 공대에 갈 거라고 1도 생각하지 못했다. 진로 상담을 위해 내가 써냈던 전공은 신문방송학과, 유아교육학과, 식품영양학과였다. 공대가 뭔지도 모르고 1,2,3,4차 다 떨어지고 5차에 겨우 붙어 온 학교. 학비가 싸니까 어쩔 수 없이 온 학교. 시간표부터 대학의 낭만은 없었다. 물리 화학 수학 영어. 고등학교 때와 다른 게 뭐가 있나. 거기에 공학용 계산기가 얹어지니 눈물이 팍 쏟아질 만큼 우울해졌다. 이런 공부를 하고 싶어 온 대학이 아닌데. 적성에 맞지도 않는 공부를 4년 동안 해야 한다니. 잘할 자신이 없는데, 아니, 해낼 자신이 없는데. 계산기를 한참 만지작대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도 하필 나 같은 주인 만나서 우울하겠구나.
공학용 계산기에게 멜랑꼴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핫핑크색 이름표까지 만들어 등짝에 딱 붙이니 조금 덜 우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계산기를 계산기라고 부르지 않고 멜랑꼴리라고 불렀다. 개도 좋든 싫든 내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 함께 지내야 하니. 멜랑꼴리는 어디로 사라지지도 않고 내가 대학을 졸업하는 동안, 휴학 2년과 유보 1년을 반복하는 동안 내내 내 곁에 머물렀다. 졸업 후 전공과 관련 없는 직업을 갖게 되었어도 멜랑꼴리는 항상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곤 했다. 뭐랄까, 멜랑꼴리는 내 훈장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대학을, 전공과목 공부를 해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리고 (쓸데없는 공대생의) 자존심이었다.
본가를 나오기 위해 짐을 쌀 때, 나는 당연하게 멜랑꼴리를 챙겼다. 쓸 일이 없는데도 꼭 가지고 나오고 싶었다. 내다 버리지 못한 전공책은 창고 어딘가에 박혀 먼지 삼키고 있을 거다. 하지만 멜랑꼴리는 내가 스무 살 일 적부터 지금까지 내 손에 있다. 가끔 꺼내서 의미 없이 숫자 몇 개 통통 두드리다 다시 집어넣고, 집 정리하다가 발견되면 껐다 켜보기도 한다. 건전지 한 번 바꾼 적 없는데 아직도 잘 켜진다. 오늘도 괜히 생각이 나서 멜랑꼴리를 찾아 꺼내 가지고 놀다가 다시 넣었다.
멜랑꼴리는 내게 던져진 우울한 수식들을 로맨틱하게 만들어주었다. 잘하고 있다고 응원도 해주고 내 손가락과 합이 맞지 않아 오답을 속삭여주기도 했다. 복잡하고 어려운 식을 이리저리 정리하면 마지막 답을 깔끔하게 내주곤 하던 나의 멜랑꼴리. 이제 더는 6.023X10^23 같은 걸 입력할 필요 없지만, 멜랑꼴리는 평생 데리고 있을 생각이다. 멜랑꼴리 등짝에 붙은 이름표는 색도 바래지 않았다.